작품공모전 입상작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 입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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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 학교 급식실 노동자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작품 응원 공모전 안내 ]
[ 학교 급식실 노동자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작품 응원 공모전 안내 ]
올해 7월 29일(월) ~ 8월 30일(금)까지 학교급식실 폐암대책위와 진보당 정혜경 의원, 더불어민주당 강득구, 김주영, 김태선, 문정복, 박해철 의원 공동주최로 진행한 [학교 급식 노동자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작품 공모전]의 수상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2021년 학교급식노동자의 폐암이 산업재해로 처음 인정된 뒤 2년 6개월 동안 113명 이상의 학교급식 노동자가 폐암 산재를 받았습니다.
환기설비 관련 점검에서 97.29%가 기준 미달이었으며, 이제 죽음의 급식실이라 불리우며 1천명 이상의 퇴사자에 인력난을 겪고 있습니다.
[학교 급식 노동자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작품 공모전]은 이러한 직업성 폐암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내어 사회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학교급식노동자의 폐암 근절을 위한 국가와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고, 급식노동자에 대한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시민들의 작품들이 웹포스터와 만화, 시 또는 에세이, 영상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제출되었습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공모전에 응모된 총 32건의 작품 중 대상 4분, 최우수상 12분이 입상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학교급식노동자의 산업재해 문제 해결을 위한 목소리에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노동조합에서도 학교급식노동자의 안전한 노동환경을 위해 더 힘차게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학교급식노동자 응원 작품 공모전 결과
대상(30만원)
초등
중등
고등
성인
태릉초등학교
정하진(그림)
방학중학교
황혜원(그림)
묵호고등학교
김용현(문학)
경상국립대학교
황서연(문학)
최우수상(10만원)
초등
중등
송정초등학교
박지은(그림)
인천아람초
홍지민(문학)
꿈키움중학교
채선우(문학)
민희주(문학)
녹천중학교
최가현(그림)
고등
성인
계산여고
주가은(그림)
마산 구암고
하다연(그림)
민하람(문학)
김호중
김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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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 초등부 대상_ 정하진(2017년생, 태릉초)
- 작품설명
: 급식노동자에 대한 뉴스 영상을 보고, 바꿔야 할 노동환경과 요구 사항을 생각하고, 행복한 급식노동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린 작품
- 선정 이유
: 어린이다운 귀여운 표현과 상상력으로 급식노동자 폐암 산재 재발방지를 위한 해결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이 참신함. 아마도 어린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금액일 “‘1억’ 같은 큰 투자”라는 구호는 직관적으로 사회적으로 충분한 투자를 해야 폐암산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공감을 일으킴.
◯ 초등부 최우수상_ 박지은(2013년생, 이천송정초)
- 작품설명
: 일하시느라 힘든 급식노동자분을 한 학생이 발견하고 그 학생의 관심으로 힘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 선정 이유
: 심플한 그림체에 깊이 있는 표현이 돋보임. 급식을 먹는 학생 등 많은 사람의 관심과 연대는 까맣게 병든 학교급식노동자의 가슴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힘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 초등부 최우수상_ 홍지민(2014년생, 인천아람초)
- 작품설명
: 더운 날씨에도 저희를 위해 고생하시는 아주머니께 급식을 먹으면서 항상 감사함을 느낀다고 전하고 싶었습니다.
- 선정 이유
: 매일 밥, 국, 반찬을 만들어 제공해주시는 급식노동자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잘 느껴지는 작품. 알록달록하게 채색한 시화로 작품의 매력이 한층 더해 짐.
◯ 중등부 대상_ 황혜원(2009년생, 방학중)
- 작품설명
: 저희의 두 번째 어머니처럼 매번 미소를 보여주시던 급식 선생님들의 아픔을 그렸습니다. 저에게 좋은 말만 해주시고 미소를 보여주시던 급식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급식을 만들어 주시면서 병을 갖게 되신 것이 마음이 아파 제가 급식 선생님들 덕에 기쁜 마음처럼 그분들도 부디 좋은 환경에서 건강하시게 일하시길 바라며 그리게 되었습니다.
- 선정 이유
: ‘포스터’라는 형식에 딱 알맞고, 완성도 있는 표현으로 돋보이는 작품. 조리흄이라는 학교급식실 폐암의 원인, 몸이 부서져라 고되게 일해야 하지만 그래도 어린 학생들을 대할 때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학교 급식노동자의 녹록치 않은 모습, 그리고 ‘미소 뒤에 아픔이 있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라고 함축적으로 표현된 연대와 공감의 구호가 한 장의 그림 안에 모두 잘 들어가 있음.
◯ 중등부 최우수상_ 채선우(2009년생, 경남꿈키움중)
- 작품설명
: 작품은 급식 노동자의 시점에서 전개됩니다, 단순 경제활동을 넘어 더운 급실식에서 몇시간식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 장면들을 묘사합니다. “점점 구워지는”이 문단 부터는 비유적으로 급식노동자들이 힘들다는 것을 표현 하였습니다, 작품의 의미는 급식노동자들의 힘듬과 처우를 개선하자는 의미를담아 비유법,묘사등을 사용해 표현했습니다.
- 선정 이유
: 시를 한줄 한줄 읽어내리면 급식노동자가 출근해서 노동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짐. ‘내 밥은 누가 해주는 걸까’라는 구절에서 노동자의 노동력을 완전히 끌어내어 쓰고, 책임은 외면하는 국가, 교육당국이 절로 연상됨.
◯ 중등부 최우수상_ 민희주(2010년생, 호수돈여중)
- 작품설명
: 학교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즐기는 점심시간의 행복 뒤에는 노동자분들의 고된 수고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그분들의 따뜻한 손길과 헌신을 기억하며, 폐암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맞서 우리 모두가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선정 이유
: 마치 학생들이 급식노동자에게 불러주는 노래 가사처럼 느껴지는 시 작품. 급식을 제공하는 노동자의 기여에 대한 인정과 이후 연대의 의지가 잘 표현되었음.
◯ 중등부 최우수상_ 최가현(2011년생, 녹천중)
- 작품설명
: 급식노동자에 대한 뉴스 영상을 보고, 느낀 바를 조리사 선생님께 쓰는 편지 형식으로 그린 만화
- 선정 이유
: (아마도) 좋아하는 웹툰의 캐릭터를 차용해, 급식노동자 노동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고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을 잘 표현한 작품
◯ 고등부 대상_ 김용현(2007년생, 묵호고)
- 작품설명
: 급식실 조리사분들이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감사합니다! 인 듯 하여, 시의 제목과 내용을 ‘감사합니다’로 표현했다. 시의 1연은 급식소 조리사분들이 일을 할 수 있는 학생들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적었고, 2연은 힉생들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듣기 위해 조리하다 폐암의 증상이 나타나는 조리사 분들을 표현했고, 마지막 연에서 ‘당신’은 무책임한 국가와 기관을 뜻한다.
- 선정 이유
: 시적 표현으로 우리사회의 학교급식실 폐암문제 해결 의지가 정말 있는지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음. 이번 공모전에 제출된 작품도 전체적으로 감사하다, 고맙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정말 감사합니까’라는 마지막 질문이 송곳처럼 박히는 느낌.
◯ 고등부 최우수상_ 주가은(2007년생, 계산여중)
- 작품설명
: 학교 급식 노동자 폐암 근절을 위한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제를 일러스트로 간단하게 그려 누구나 단번에 이해하기 쉽게 표현 했습니다
- 선정 이유
: 다양한 노동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는 그림. 마지막에 급식노동자와 학생이 함께 손잡고 문제 해결로 나아가는 모습이 명쾌함. 그림체와 채색 역시 깔끔하여 전달력도 매우 좋음.
◯ 고등부 최우수상_ 하다연(2007년생, 마산구암고)
- 작품설명
: 계속해서 개선되지 않은 환경으로 인해 검은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급식 노동자 모습을 그려 폐암에 걸리는 것으로 표현하였고, 그걸로 인해서 학생들이 영향을 받는걸 점점 검은색으로 바뀌는 급식판 하트로 표현하였다. 하트는 노동자가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 선정 이유
: 그림 자체의 완성도가 높음. 급식노동자와 학생의 모습을 잘 묘사함. 4컷 만화로 짜임새 있게 스토리를 구성했음. 폐암을 유발하는 환경과 폐암 산재 급식노동자의 가슴아픈 현실에 대해 비유적으로 잘 표현한 점이 인상깊음.
◯ 고등부 최우수상_ 민하람(2007년생, 호수돈여고)
- 작품설명
: 매일 우리의 식탁을 책임지시는 급식 노동자님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함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 선정 이유
: 국가와 사회가 급식노동자의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표현함.
◯ 성인부 대상_ 황서연(2003년생, 경상국립대)
- 작품설명
: 평생 나와 학생들의 식사를 차리느라 자신의 식사는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나의 어머니, 그리고 모든 급식노동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는 시.
- 선정 이유
: 급식노동자였던 어머니와의 구체적인 추억을 시로 녹여 표현한 점이 매우 인상깊은 작품. 어머니 혹은 급식노동자가 차려내는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짐. 시 전체적으로 아주 따듯한 위로의 마음이 느껴짐. ‘따듯한 한 끼’를 이제 내가 대접하고 싶다는 문구에서 연대의 마음이 잘 느껴짐.
◯ 성인부 최우수상_ 김호중(2005년생, 원광대)
- 작품설명
: 고된 일 속에서 받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 묵인하던 사회가 이번 일을 계기로 학교 급식노동자분들의 부당한 대우가 변화하기를 기원하는,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긍정적인 시
- 선정 이유
: 참신한 은유로 급식실에서 노동하는 이의 차림과 모습, 급식실의 상황, 그리고 병들어가는 육체를 표현한 것이 인상깊은 작품.
◯ 성인부 최우수상_ 김도희(2003년생)
- 작품설명
: 감사한 마음에 대한 보답
- 선정 이유
: 공모전의 취지대로 내가 직접 경험한 학교 무상급식, 내가 직접 만난 급식 노동자와의 추억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학교급식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주제의식를 잘 드러낸 에세이 작품. 급식실 도우미로의 경험과 매체를 통해 접한 급식실 모습으로 급식노동의 현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충격, 문제의식이 잘 표현되어 있어 이 글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학교급식 폐암문제 해결을 위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
<수상작 보기>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민현순 / 그 선생님은 학교비정규직입니다
그 선생님은 학교비정규직입니다
교무행정지원사 민현순
새들도 집이 있고
풀꽃도 피었던 자리에 다시 피고
하루를 시작하는 해도 자리가 있는데
공무직은 없습니다.
가르치는 교사도 있고
책임과 존중을 배우는 학생도 있는데
존중받는 공무직은 없습니다.
꽃은 향기를 내고
배움은 지혜를 만들고
교사는 올바른 가르침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그곳에서 공무직은 그림자로 남습니다.
평등한 자리인 것 처럼
다스리고, 순응을
존중과 배려라는 이름으로
배우고 가르치는 그곳
교육현장
새 학기에 하는 입학식
학생들과 학부모에게
인사하는 자리
그곳에도 공무직의 자리는 없습니다.
학생들의 가치와
교사들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백년교육의 자리
교육현장
그곳에서 공무직을 보는
시선에는
자리도, 존중도, 롤 모델도 없는 투명한 그림자로 남습니다.
교무실과
학교 어딘가에서
교사들의 심부름으로
손님맞이에 바쁜 어떤 선생님
그 선생님은 학교비정규직 입니다.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노정숙 / 우리에게 그런 날이 올까?
우리에게 그런 날이 올까?
조리실무사 노정숙
비정규직!!
정규직인데 정규직이 아닌 직업군!!
아이를 키우면서 살림과 일을 병행 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러던 중 알게 된 교육공무직 학교 급식실...
방학에는 아이들과 보낼수 있는 최고의 장점이 있었고 교육청 소속이라 임금체불은 없을꺼고 고용이 보장되어있어서 아이를 키우면서 하기 좋은 직업이였다.
하지만 마냥 좋은 것은 아니였다. 아침 일찍하는 검수와 급식시간을 맞출려고 하다보면 출근시간이 남들보다 더 빠르고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급식실 다니시는 분들은 거의 5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출근한다.
출근 하자마자 작업준비를 하고 아침 일찍 검수준비와 전처리를 시작한다.
처음으로 들어온 급식실은 한마디로 전쟁터였다.
열기는 엄청났고 기구들은 대형기구에 한번도 본적이 없는 큰 솥에 큰소리로 말을 해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처음 신규발령으로 학교 급식실 왔을 때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만큼 모든 건 바빴고 빠르게 눈치껏 일을 해야만 했다,
혼나면서 일을 배웠다. 신규든 경력직이든 인수인계를할 시간도 받을 시간도 없는 게 급식실이다.
급식실은 누구를 가르쳐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급식 1분전 까지 시간에 쫒기면서 많은 양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바쁘고 긴장해야 한다.
몇백인분 양에 엄청 큰솥에 키보다 더 큰 삽으로 조리를 해야 하고 튀김이나 전하는 날이면 땀은 온몸에 줄줄 흘러서 어지러워도 급식시간 맞춰야 되기 때문에 쉬지를 못한다.
그런 날은 퇴근할 때까지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속은 니글 거린다.
다른 공공기관과 비교를 하자면 학교은 식수 인원이 거의 두배다,
그런 식수 인원을 우린 당연시 여기고 견대 내야만 한다.
또한 지금 급식실은 노동 강도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오픈되어있는 급식메뉴!! 오픈된 만큼 다른 학교와 비교도 되면서 급식메뉴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다양성을 요구하고 있다.
예전처럼 급식이 밥만 먹는다기보다는 맛있는 음식에 질과 영양을 고루 갖춰야만 한다.
메뉴와 재료 하나하나에 모니터링 하는 학부모 기대치를 맞추려면 급식실 영양사와 조리직원들의 노동 강도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동안은 고용불안이 없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한다.
얼마 전 뉴스에 죽음의 급식실 보도가 나온 적 있다.
건강했던 사람들이 매캐한 연기속 조리실에서 8시간 일하다 보니 폐암에 걸린 조리원들...
유해물질 엄청나게 뿜어져 나오는 조리실에서 일해야만 하는 일터...
이처럼 열악한 노동 환경은 누구에게 개선을 요구하고 하소연 할수 있을까?
급식실에 대한 기사가 나오면 집회를 하고 교육청에 가서 하는 우리 시위는 단지 우리 얘기를 들어 주고 권리들을 찾고 싶을 뿐인데 불성실한 교섭태도로 일관하는 교육청!!
얼마전 급식 파업이 있었을 떄 사람들은 우리에게 급식을 볼모로 파업을 해서 돈을 받아내려고 한다라고 생각하고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학교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식당 아줌마라 말하고 보는 사람들의 시선...
일하면서 내가 가졌던 책임감과 나만의 자부심은 점점 내려가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방학 때 놀아서 좋다고 얘기 하지만 무급에 방학 때는 그동안 아팠던 몸을 충전 해야되고 근무 중 고생한 몸을 돌봐야 되서 물리치료도 해야 된다.
다음 학기에 또 일을 할려면 몸을 다시 충전 시켜야만 한다.
아침에 출근하면 갱의실에 파스 냄새가 나고 오후에 퇴근할 때는 땀 냄새가 진동을 한다.
가끔 동료들을 보고 있므면 마음이 찡할때가 많다.
정말 좋은 직업을 가졌다면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멋있다고 생각 하겠지만 급식실에 현실은 정말 저렇게까지 일하나 싶을 정도다.
땀이 온몸을 젖을 정도로 일하고 말 그대로 골병 나는게 우리 직업이다.
말이 좋아 교육공무직이지 식당보다 더 힘든 노가다라고 얘기 한다.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안전보건 교육을 매년 4분기 8시간씩 받아야 한다.
근무 시간 내에 할 수 없게 현실이다. 업무량을 조절해서 하라고 하지만 업무량을 조절할만한 조건은 어느 조리실도 안될 것이다.
일을 조절할만한 업무가 아니다. 노동조건에 맞는 안전교육을 해야 한다.
하지만 비정규직의 현실이다.
하루는 12살된 막둥이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엄마가 무슨 일 하는 줄 알았다면서 일 그만 두면 안되냐고 울면서 말한 적이 있다.
엄마 급식실 일하는 줄 아는 아이가 갑자기 그러니 너무 놀랬다.
아들방에 들어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시청각 교육으로 급식실 노동법 동영상을 봤다고 펑펑 울었다.
대충 짐작이 갔다.
엄마는 그런 일 없다고 괜찮다고 하니 너무 속상하다고 우는 아들을 달래주고 나오는데 나도 눈물이 났다.
비정규직의 현실이다. 차별쯤은 견뎌야 되고 열악한 환경은 당연시 여겨야 되는..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하고 싶다. 일한 만큼 우리 권리를 찾고 싶다.
급식실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고 싶다.
화학약품에 노출되어있는 우리 환경을 개선하고 싶다.
내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에서 일한다고 자랑하고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다.
우리에게 그런 날이 올까?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노미춘 / 그날까지
그날까지
조리실무사 노미춘
다니던 직장이 경영악화로 문을 닫았다. 무얼 해야하나 고민끝에 지인으로부터 학교급식실이 매리트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학원을 다녀 한식조리기능사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대체인력으로 두달반짜리 계약 후 다시 1년 다시 6개월짜리 계약직을 전전하면서 그 동안 중식조리기능사자격증도 취득하고 교육청 교육공무직 모집부분에 서류를 넣어 정정당당히 합격했다.
면접 합격하던 날 교육공무직에 합격했다고 주위에 많은 분들이 축하 메세지를 보내주셨다.
이제 나도 교육공무직 정규직이다라며 앞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 1월 신규교육을 마치고 3월 1200명 가량의 중학교에 발령받았다.
전에 대체인력으로 일 했던곳은 1300명의 초등학교
첫날 시간이 어찌 지나갔는지 하루가 지났다.
하루를 무사히 보냄에 감사를 느꼈다.
전쟁터를 방불케했던 아침8시반부터 오후 퇴근시간까지는 화장실 갈 시간도, 물을 마실 시간도 잠시 쉴 시간도 허락치않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하루 지나고 이틀, 일주일
그리고 한달, 급여를 받았다.
정식으로 교육공무직에 합격해 열심히 일한 후 받은 급여는 정말 뿌듯했다.
하지만 알았다.
나는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이라는 걸
그나마 다행인 것은 1년 후 재계약 하는게 아니고 정년 보장되는 무기계약직 이라는 것을.
이런게 비정규직이구나 방학이 낀 달은 급여 차이가 많이 난다.
그리고 여름방학을 맞았다 7월은 방학이 끼여 반정도 일했다.
급여는 반토만 8월도 반토막
다음해 1월 중순경 겨울방학을 맞았다. 급여 반토막.
2월 청소일 수 4일과, 명절 상여금을 포함해 받은 금액에서 세금을 제하니 2월 급여는 20여만원 정도 이걸로 한 달을 살 수 있을까 외벌이라 한 달 공과금도 해결하기 힘들다.
남편은 교육공무직으로 학교 급식실에 발령받은지 3개월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학교 일에 적응하기도 전에 남편이 곁을 떠나고 두 아이들과 살아야 된다는 생각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무생각도 없이 일만 했다.
그래야 사니까 정규직 비정규직 그런 생각도 못하고 61세까지 일할수 있다는 무기계약직에만 초점을 맞추고 일했다.
급식실에서 일하시는 분들 중 의예로 가장이 많다는 걸 알았다 그럼 그 사람들 생계는 어떻게 하나?
그렇다고 퇴근 후나 방학 때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이중 취업이 되어 학교에서 허락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방학 때 생계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있을 때는 방학 때 쉬어도 별 무리가 없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일해서 두 아이들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달 두 달 일하면서 일하는 것에 비해 급여가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수 150명당 조리원 한 명 일의 강도는 굉장히 쎈 편이다.
초등학교는 초등학교대로 힘들고 중고등학교는 중고등학교대로 애로사항이 많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내 직업 내 일자리이다보니 군소리없이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학교뿐만이 아니라 전국에 비정규직이 많다는 것도 그해 여름 총파업을 하고 서울 집회를 다녀오며 알았다.
그동안 나는 우물안 개구리였다는것도 새삼 느꼈다.
남편의 그늘 아래 남편의 보호속에서 잠깐 잠깐 일하다가 막상 혼자되어 살아보니 세상은 내가 생각한대로 돌아가는게 아니었다.
비정규직도 많고! 무기계약직도 많고! 아예 비정규직에도 끼지못하는 사람들! 최저임금도 못 받는사람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단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소리를 내야하고 누군가는 행동을 해야하고 누군가는 그 행동에 맞춰 이러한 불공정한 세상을 바로 잡기위해 싸워야한다는 것을...
우리나라에 비정규직이 이리 많았나?
무슨 비정규직이 이리 많을까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비정규직이 많다.
작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를 개사한 학교를 빛낸 100인의 보물들이란 노래를 하면서 학교에도 비정규직이 이리 많았나 싶을정도로 많은걸 보고 놀란적이 있다. 들어보지도 못한 여기저기 곳곳의 비정규직들!!!
알면 알수록 세상이 너무 불공정하구나
대한민국은 비정규직 천지라는 것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알까?? 갑자기 의구심이 생겨 씁쓸한 마음 뿐이다.
처음엔 당연히 학교에는 정규직들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학교안을 들여다보면 비정규직 천지다.
아침에 아이들 등교할때 학교지킴이 선생님을 만나고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받을때는 정규직 교사와 또 구별이 되지 않는 많은수의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들의 수업을 받는다. 오후엔 돌봄전담사, 방과후교사 쌤들의 돌봄과 수업을 받는다.
그리고 또한 급식실에서는 조리원, 조리사, 영양사등 비정규직 선생님들이 그날의 급식을 전담한다 이렇듯 학교의 하루는 무기계약직 기간제교사등 많은 비정규직 쌤들과 하루일과가 함께 진행되고 마쳐진다.
몸이 아파 쉴 때도
집에 일이 있어 쉴 때도 결코 편안하게 쉴 수 없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내가 쉬므로 동료들의 힘든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쉬는 것도 쉽지가 않고 일하는 도중 다치는 일도 부지기수다.
정해진 시간안에 요리가 완성 되어야하고 배식도 맞춰서 잘해야한다.
혹 배식양 조절을 잘못하여 나중에 오는 학생들에게 배식을 못하는 날엔... 배식사고에 따른 압박감과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는다.
언젠가 그날 메뉴에 탕수육이 있었다. 수제탕수육을 하는 날인데 아침부터 쉽지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내가 튀김옷을 입혀 기름솥에 넣어주면 파트너가 튀기고 건지는 일을 했다.
워낙 많은 양이라 튀겨도 튀겨도 줄지를 않고 배식시간은 다가오고, 피말리는 시간을 보내는데 조리사님께서 얼른 코팅솥 하나를 올려 같이 튀기라고 하셨다. 겨우 겨우 배식직전 튀김을 끝내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손만 겨우 씻고 배식에 들어갔다. 점심식사는 생각지도 못하고 끝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지금 다시 떠올려도 정말 맘졸이는 순간이었다.
이렇듯 늘 시간에 쫓겨야하고 배식량도 조절해야하고 특히나 안전에도 신경 써야한다.
바쁘다보니 종종걸음으로 다니기 일쑤고 그러다 보면 렌즈 벨브나 기구들 모서리에 부딪쳐도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우선 눈앞에 쌓인 일처리가 늘 먼저다.
일을 마치고 씻을때 보면 다리 여러저기 몸 여기저기 멍이 드는 건 예삿일이다. 물론 조심하지 못한 본인 책임이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바쁜 조리실 안에서 안전하게 일한답시고 천천히 일하라고 하는건 어불성설이다.
또한 청소할때도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독한 약품 사용과 무거운 트렌치 세우는 일도 회전솥 위의 후드청소도 위험하고 뜨거운 물 사용할때도 위험은 언제나 우리곁에 도사리고 있다.
교육받을 때 독한 약품 사용이 우리 몸에 얼마나 해가 되는지, 안전하게 사용하라는 말을 듣는데 왜 굳이 독한 약품 사용하면서 그러한 교육을 하는지 교육하시는 강사님께 질문한 적이 있다.
단체급식이다보니 세균 때문에 이러한 약품을 쓸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안전하게 사용하라는 강사님의 말씀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점검 나올때 어느 정도의 얼룩과 세균은 넘어가 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거는 어디까지나 개인차가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독한 약품 사용과 위험천지인 이곳에서 나는 왜 일 하는가, 안하면 되지?
안하면 우리 아이들의 급식은 누가 해 준단 말인가
누군가는 해야되고 그 누군가는 바로 나인 것이다.
급식실 일이 하고 싶어 내 스스로 결정하고 들어왔다. 힘든 일도 있지만 이렇게 모두 힘든일만 있는건 아니다. 아이들이 급식을 맛있게 먹어 주고 맛있는 급식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말 들을때는 정말 뿌듯하고 이 일 하길 참 잘했단 생각이 든다.
그럴땐 모든 피로와 일하면서 느꼈던 고통이나 힘듦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조리원 한명 당 학생수 150명이 아닌 100~120명정도로 해준다면 우리의 일이 조금은 덜 위험하고 덜 힘들 것이라 한다.
그럼 산업재해도 덜 발생하지 않을까??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이 있다.
학교급식실일은 딱 10년만 해야 한다.
안그럼 병원 달고 산다.
실제로 10년 넘은 직원들은 손가락 관절과 어깨통증 무거운걸 들고 다니니 허리통증에 디스크 거기다 손목터널증후군 다리 통증 또한 종종걸음으로 다니다보니 족저근막염같은 걸 달고 산다.
수술하면 되지않냐고 하지만 수술을 하게 되면 회복할 때까지 수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최후보루로 남겨놓는다.
그 외에도 너무 힘들어서 !!
적응을 못해서 !!
다쳐서 !!.
아파서 관두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렇듯 각종 위험과 고통이 따르지만 이 속에서 우리는 여성노동자로서 귄리를 찿고 동료애를 느끼고 아이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고 있다.
요즘은 맛벌이부부가 많다보니 요리를 할시간도 없고 못하는 사람들에겐 학교에서 먹는급식이 굉장히 중요하다.
한 예로 동생은 공부만 하던사람이라 요리를 정말 못한다 그래서 학교급식이 가장 맛있다고 하는 조카들 방학만 되면 아이들 밥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코로나로 인해 전체학생 등교가 중지되면서 격주로 학교를 가다보니 급식을 못해 아이들이 점점 더 말라가고있다는 말을 들었다. 배달음식도 질렸고 동생은 요리를 못한 데다 직장이 타지역으로 발령나다보니 집에는 아빠와 아이들뿐이라 집안일은 고사하고 먹거리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우리가 해주는 점심 한끼이지만 그 한끼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한끼 식사인지 모른다.
이런 면에서는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고 일 할만하단 생각이 든다.
이렇게 큰?일을 하는 우리에게 오는 급여라든가 복지는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방학때만이라도 어느정도맞춰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무기계약직이 어떻게 정규직이란 말인가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이라 할 수 없다.
정규직이라면 방학때 기본급이라도 아니 기본급에 몇10프로라도 줘야 되지 않은가.
방중 비근무에 !
무노동무임금 !!
방중 기본급얼마라도 주든가
허울뿐인 정규직 이건 결코 정규직이라 할 수 없다.
모르는 사람들은 놀면서 기백만원씩 받아가면서 무슨 파업이냐고 난리다 하지만 속내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 그런말 하지 못한다. 오히려 더 격려를 해주면서 몸 관리 잘하라고 한다. 이것이 방학중 비근무자가 처한 현실이다.
나 포함 외벌이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집안일하며 직장생활하는 전국의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 좋은 소식 처우개선을 위해 오늘도 교육청 뙤얃볕마당에서 열일하는 우리노동조합상근자들
부디 교육청에서 우리의 말에 귀기울여주고 우리비정규직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머리를 까까중으로 깎은 학생이 있었다. 급식먹으러 오면 늘 얼굴에 불만이 가득하고 더 달라고 했을때 남은 학생들의 배식량 때문에 미안하다 다음엔 더 많이 줄께라고 말하면 그럴 때마다 에이C에이C를 남발하고 거의 반항수준인데 등치큰 남학생이라 어떻게 나올까봐 내심 무서웠다.
그러길 여러차례 같이 화낼수가 없어 우리가 반항기와 불만투성이인 중2병학생을 살리자고 다음부터는 좋은말로 타이르기로했다. 또한 급식량도 더 많이 주며 맛있게 먹고 건강하란 말로 하다보니 차츰차즘 좋아지는 모습이 보이고 인사도 안하고 퉁명스럽던 말투가 몇개월 지난 뒤에 부드러운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중3이 되어서 다시 만났는데 우리가 알아 볼 수 없었다 키도 더크고 머리도 길고 하니 정말 훈남학생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는 급식실에서 보통 밥하는 아줌마로 통하지만 한사람의 인생에 좋은 점을 끼쳤다는게 얼마나 뿌듯한지. 급식실에 오는 학생들 우리는 그냥 밥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학생들을 위해 애쓰는 전국에 있는 우리 급식실 선생님들 힘들지만 그래도 보람을 느끼며 안전하게 일해보고자 한다.
무기계약직이 아닌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이 되는 그날까지
방학중 비근무로 생계걱정을 해야하는 방중비근무자들의 급여와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노동조합원들 승리하여 우리의 안전한 생계를 보장받읍시다.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김은주 / 언제나 내편
언제나 내편
특수교육지도사 김은주
듬성듬성 파뿌리 보일 때 만난
언제나 내 편인
늦게 만난 내 친구
비정규직이어서 해고라는 나를 위해
함께 싸워준
늦게 만난 내 친구
쥐똥만 하던 내 월급
함께 싸워 소똥만 하게 해준
늦게 만난 내 친구
시들어버린 꽃처럼 살던 내게
햇빛을 비춰 세상의 눈 밝혀준
늦게 만난 내 친구
길을 잃어 방황할 때
내비게이션 같던
늦게 만난 내 친구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처럼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처럼
내 뒤에 네가 있으니 두려움 없네
내 친구는 노동조합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이 세상 이별 날까지
우리 함께 하자
언제나 내편 하자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김숙희 / 나의 하루
나의 하루
조리실무사 김숙희
온 몸의 관절 마디마디가 툭툭 끊기는 느낌과 함께, 나는 오늘도 학교로 향한다. 새벽부터 일어나 밤새 밀린 빨래를 하느라 녹초가 된 나는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학교에 도착하여 준비를 마치고 나니 점심시간까지 약 4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몇 백명 아이들의 급식을 준비하기에는 촉박한 시간이다. 영양사에게 각자 담당한 메뉴의 조리방법을 다시 한 번 익히고, 이제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된다. 군대에서 볼 법한 많은 양의 재료를 씻고 다듬은 뒤 무거운 솥을 이리저리 옮긴다. 욱신욱신 몇 달째 지속되는 손목의 염증은 나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늘은 튀김 메뉴가 있는 날이다. 180도가 넘는 기름의 열기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땀은 비오듯이 쏟아진다. 조리실은 이미 뜨거운 열기로 가득차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넘치는 재료를 뒤섞기 위해 삽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우리는 점점 더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배식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바트에 나눠 옮기고,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한다.
12시가 땡하고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내려온다.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은 오늘의 급식을 기대하며 한껏 신이난 눈치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힘들었던 시간은 싹 잊히고 뿌듯함만 남는다.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며 쌍따봉을 날려주는 아이들은 매일 반복되는 힘든 일들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아이들의 배식이 끝난 후 동료들과 늦게서야 점심을 시작한다. 전쟁과 같은 오전 근무가 끝나고 진이 빠져버렸지만 오후 근무를 위해 밥을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10분만에 후루룩 삼켜버린다. 식어버린 밥과 잔반들이지만 고된 일을 했던 터라 꿀맛이 따로 없다. 식사를 빠르게 끝마치고 8명의 사람이 발을 뻗기도 힘든 비좁은 휴게실로 가서 다리를 구부린 채 앉는다. 고작 10분 남짓한 쉬는 시간이지만 동료들과의 휴식은 천국과 같다. 거울 속에 비친 나와 닮아 보여서일까, 급식일로 인해 안 아픈 곳이 없는 동료들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지쳐보인다. 무거운 솥단지를 옮기느라 허리와 어깨는 나간지 오래, 이제는 어떤 병원도 소용이 없다. 앉아 있을 틈 없이 계속 서서 일하는 다리의 하지정맥류는 나아질 기미를 안 보인다. 진하게 탄 믹스커피 한 잔에 조리원의 애환을 애써 날려보내며 짧지만 달콤했던 휴식을 마무리한다.
배식이 끝난 후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식판과 음식물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독한 약품으로 무릎에 독이 올라 고생했던 것을 떠올리며 요리조리 피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식판에 딱딱하게 붙은 밥알을 떼어내기 위해 뜨거운 물과 세제를 섞어 초벌 설거지를 시작한다. 매캐한 수증기는 이내 조리실을 메우고 펄펄 김을 내뿜는 세척물에 이리저리 손을 담구었다 빼내며 연신 기침을 한다. 커피와 함께 식어버린 땀은 다시 온 몸을 적시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병원에 갔다. 손이 저리고 팔이 올라가지 않아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당분간 팔을 쓰지 말고 무리를 해선 안된다는 의사의 반복되는 말에 의무적인 대답만 하고 병원을 나선다. 물리치료가 끝난 뒤 집으로 가는 길에 가족들을 먹일 음식을 위해 장을 본다. 무거운 장바구니로 인해 팔이 더 아파진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다. 학교에서도 내내 서서 일만 한 탓에 집에 오면 누워서 푹 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그러나 청소며 음식이며 집에 할 일이 잔뜩 쌓여있기에 나는 바로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오후 열시, 집안일을 마친 나는 내일 다시 험난한 급식실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지지만 내일 나갈 급식의 메뉴와 조리법을 마지막으로 익히며 쓰러지듯 잠을 청한다.
이것은 10년이 넘도록 해온 나의 급식실 조리원의 하루를 담은 일기다. 출산을 하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신경써야 하는게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더 잘 먹이고 더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급식실 조리사 일을 시작했다. 그 조그만한 아이들은 이미 의엿한 청년이 되어있었다. 아이들의 커져버린 키만큼 나의 15년 동안 보낸 조리실에서의 시간도 빠르게 흘러갔다. 고된 육아와 일의 병행은 자신만만했던 내 젊음을 가져가고 관절염을 돌려주었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달려왔다. 결혼과 출산으로 단절된 경력으로 인해 나에겐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펄펄 끓는 물과 기름에 여기저기 화상을 입고도 버텨야 하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고되지만 아이들이 집에 오는 시간에 맞춰 일을 끝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요새 열악한 학교 급식실의 실태를 다룬 기사를 여럿 접하였다. 조리흄으로 인해 폐암으로 숨진 여성 노동자의 첫 산재 인정 기사,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조리실과 발을 뻗을 수도 없는 휴게실에 다닥다닥 붙어서 쉴 수밖에 없는 조리원들, 조리원 정원 감축 등을 다룬 기사는 여기저기 보이지만 정작 우리의 조리실 일상은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년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조리, 배식, 방역으로 인한 삼중고로 이미 노동의 강도는 한계에 도달했다. 조리원 한 명당 100명이 훨씬 넘는 인원의 식사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시차 배식과 가림막 청소 등과 같은 추가업무는 정해진 노동 인원으로 대신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더 심각한 것은 열악한 조리실의 환경이다. 180도가 넘는 기름으로 인한 내부의 자욱한 연기와 열기는 환기가 잘되지 않는 탓에 사그라질 줄을 모른다. 턱없이 좁은 조리실에서 조리양에 비해 환기 용량은 매우 부족한 상황이며 조리 시 발생하는 유해물질은 눈과 호흡기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촉박한 시간 속에 빠르게 조리해야 하는 급식실 특성상 연기로 인해 눈이 따가운 채로 미끄러운 조리실 바닥을 이리저리 뛰어가며 움직여야 하는 까닭에 안전사고를 피하기가 쉽지 않다. 식판 사이, 식기나 개수대 사이에 끼이는 사고는 물론, 넘어져 무릎이 깨지고 뜨거운 식기나 기름에 데이는 산업재해는 흔한 일이 되었다. 체감 온도는 44도 가까이에 육박하고 열기로 인해 조리복은 이미 땀으로 적셔져 있다. 이런 작업 환경에서 오랜 초고강도 노동으로 근골격계 질환을 가지지 않은 동료들은 찾아볼 수가 없는데 저마다 손가락, 어깨, 허리, 무릎 등 온 몸의 근육과 관절은 조리 업무를 하기 위한 제 역할을 못하게 된 지 오래다. 위험한 조리실 안에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조리원들은 언제 다칠지 모르는 상태로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이다.
과거보다 여성의 직업이 다양해지고 일을 하는 여성이 많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을 겪는 여성들이 나설 수 있는 무대는 많지가 않다. 따라서 많은 여성들이 청소노동자, 급식실 조리원과 같이 근무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높은 강도의 업무를 견뎌내며 일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최소한의 근무환경을 보장한다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고를 최대한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대로 설치된 환기 시스템과 적절한 인력배치, 위험한 조리실 속 빈번하게 발생하는 산업재해를 보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고 급식실 조리원에 대한 인식 개선이 신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안전한 조리실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에게 건강한 한 끼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라본다.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김서현 / 17세 소녀의 과거는 꿈, 미래는 희망
17세 소녀의 과거는 꿈, 미래는 희망
구 육성회 김서현
책가방을 메고 잘 다려진 교복에 옹기종기 친구들과 깔깔, 낄낄 거리며 학교등교 할 나이인 17세 소녀가 사회초년생이 되는 날. 수업받으러가는 학교가 아닌 생애 첫 직장을 나가는 날이다. 행여라도 친구들 눈에 띌까봐 땅바닥만 보고 걷고, 또 걸었다. 학교에 도착 하자마자 선생님들 커피 심부름, 재털이 비우기, 숙직실 청소하기, 직원들 책상닦기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나의 이름은 첫날부터 “김양”이 되었다.“김양”2장복사해오소, “김양” 손님오신다네 차 석잔, 학교에 행사가 있으니 다과 준비하소.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이게 직장인가? 어린마음에 첫날부터 마음을 많이 다친날이였던걸로 기억한다.하루는 선생님과 서무과장님이(행정실장 전 직책)크게 다투신날이 있었다. 행정실에 재떨이가 날아다녀 맞았던 기억 안경을 쓴 나는 지금도 아찔한 기억이다.
친목회가 있는 날이면 나는 그야말로 행정실을 지키는 지킴이가 되었고,심지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직장내 “성희롱” 발언은 분위기 전환이라 하여 많이 들어야만 했었고, 주 업무시간에 왜 그리 사무실에서 담배는 아무 거리낌없이 피우는지 난 그저 잔 심부름 전담이 되어버렸다. 애경사가 많은 계절이면 워드로 주소작업하여 하루 종일 오리고, 풀칠하여 봉투붙이고, 우체국까지 먼 길을 걸어서 우편물 발송하고, 교장선생님 발령시는 관사(사택)청소며, 학교 화장실 변기청소, 하물며 여름에는 운동장의 잡초를 호미로 메는일이 많아졌다. 방학때는 급식이 없어 직원들 밥까지 해야했고, 행정실장님 교장선생님이 시키는 일은 아무말없이 하는 자가 되어버렸다. 시키는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연시 하게 생각하였지만 10대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차고, 점점 감정이 없는 감정노동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배워야만 했다. 배우고 싶었다. 그래야지만 업무를 줄거라 생각했다.
당장 직장을 그만둘 수가 없어 방통고, 야간대학을 다니며 하루에 잠은 4시간으로 열심히 학업과 공무원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그치만 나의 몸은 건강이 허락지가 않아 늘 시험 당일만 되면 스트레스, 과로로 인하여 여러차례 입원과 퇴원을 하여 낙방을 하였다. 20살이 되던 대학 입학후 드디어 나에게 주어진 첫 업무 “세입”업무 급식비와 운영지원비를 지원없이 학부모 부담으로 받던 시절이고, 단기적인 외환부족으로 IMF사태가 생긴 터라 교육비지원(국민기초수급자)가정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미납금은 빈번하였고, 수납을 위하여 퇴근 후 가정으로 찾아가면 힘든 가정사를 들으며 남일 같지않아 할머니, 어머니를 서로 부등켜 안고 많이도 울었던 일, 차마 미납금을 납부해달라는 말도 못했던 기억, 지금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지원,감면제도는 정말 훌륭한 결정이라 생각하여 머리숙여 감사를 드린다. 2001년 학교회계가 도입되면서 인건비 보조를 받는 학교 육성회직원들은“해고”가 되어 막막했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고, 학교업무를 배우는게 너무도 좋았기에 전라도를 떠나 경기도로 옮겨 더더욱 일에 매진하였다.
초등학교 행정실로 갔더니 갑자기 급식업무를 전부다 넘겨주셨다. 식단, 발주는 영양사님의 주 업무이면서 행정실에선 급식에 관한 모든 업무를 지시하는거에 싫은 내색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교육행정인 사이트로 접속하여 하나씩 배워가며 업무를 터득할 수가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11개월 근무중 고등학교 사립학교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근무를 시작하였다. 신설학교에 투입이 되어 공립과 다른 업무를 하다보니 새벽 출근, 자정이 넘어서 퇴근하는 일이 반복되었고, 어느날 기계같이 움직이는 모습에 자꾸만 흐르는 눈물은 나 자신도 주체를 못할 정도로 너무도 힘들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아마도 타지 생활의 외로움과 고향이 그리워 더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새벽 늦은시간 일기를 쓰듯 교육행정 전문사이트 자유게시판에 구구절절 적어내려가며 힘든상황들을 적으며 마음을 달래다가 다시 글을 삭제하기는 반복했던 나에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금의 학교 차석선생님께서 그 글을 보시려고 그랬던 것 같다. 그분도 새벽에 업무를 하다가 우연히 글을 보고 읽어 내려가는데 다음장으로 넘기면 삭제되기를 반복하는걸 보셨다며 나의 타지생활의 힘든 점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다음날 아침 지금의 학교 차석선생님께 걸려온 전화 한 통의 목소리 전라도의 말투에 얼마나 울었는지— 곧 지금의 학교가 (구)육성회직을 뽑을 것 같다며 생각이 있으면 원서접수를 하는게 어떻겠냐는 제의에 무조건 원서접수와 면접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학교직원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속에서 근무하던중 학교에서 남편을 만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첫 아이를 출산하고 복직 하였을때 기능직 10등급 3호로 급여를 받고 있었으나, 예산이 부족하다며 다음해인 3월에 급여를 지출한 후 갑자기 서명을 하라고 지시하시는 거에 당황스러웠다. 서명을 하지 않으면 이 자리 욕심내는 사람이 많이 있다 하시면서 협박아닌 협박을 강요하시며 서명을 요구하셨다. 어디에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비정규직인 나에게 힘을 주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사용자분들은 학교 비정규직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마음에 들지않는다는 이유로 온갖 협박을 하기 시작하였다. “절이 싫으면 중이 가는것이지 절이 옮겨갈수는 없다”이 자리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리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지시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학교회식도 근무의 연장이라며 술을 강요하였고, 회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상사를 무시한다며 다음날 더 큰 보복이 따라오기 일쑤였다. 회식중 도우미 역할도 강요하여 거절하면 안되는 정도의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직위를 이용한 “갑질”을 하고 계셨다. 하물며 학교의 빈땅에 농산물을 지어드신다며 농산물 포트에 양배추, 김장용무씨앗, 김장배추씨앗을 넣어 출근시 밖으로 내어 물을 주고, 퇴근시 안으로 들여놓아 묘목을 가꾸어 땅에 심어 생산할 때까지 물을 주었다. 배추 뽑은다며 바쁘지 않으면 나와서 도와라, 커피몇잔 타와라, 직원으로 보기보다는 무보수 일꾼으로, 사적으로 개인적인 업무를 지시하시는 그 분은 존재이유만으로도 스트레스였다.
업무는 어떻게는 처리를 할 수 있었으나, 사람에게 시달리는 업무는 정말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해져만 갔다. 지금의 근무여건이 좋아진 건 2010년 학교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TV, 언론에서 방송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꼭 내편이 생긴 것 같은 든든한 빽그라운드? 하지만 학교측에서는 가입조차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더욱이 근무평정 점수로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난 사용자가 무서워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이리 새 가슴이였고, 겁이 많았는지....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사용자 측에서는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고 파업을 참여한 직원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눈치를 주며 노동조합에 대한 안좋은 인식을 조합원들에게 세뇌교육을 시작하였다.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에 최초로 가입하면서 왠지 모를 뿌듯함이 생겨났다. 내 편이 생긴 것 같은 뿌듯함 내 직종의 부당하게 내몰린 행정사무원(최초임용당시:호봉제에서-연봉제로 변경)연봉제 선생님들의 호봉제가 우선이라는 과제를 안고 뜻을 같이할 선생님을 찾으면서 “연봉제”를 “호봉제 단일화”의 과제를 놓고 교섭을 풀어가면서 연봉제 선생님들과 즐겁게 피켓시위를 참여하여,드디어 2018년 3월 10년간의 서러운 연봉제를 청산하고 호봉제 단일화를 이끌어 내었으나, 그럼에도 100%가 아닌 총경력의 30% 9급에6호봉,
사람들은 말합니다.
공무원과 똑같은 호봉이니 급여가 꽤 많이 올랐을거라고 그러나, 2012~3년부터 행정사무원티오를 일반직 정원티오에 포함하여 일반직과 똑같은 업무를 하게 되었고, 저희도 회계감사는 똑같이 받고있는 실정입니다. 학교가 적어 일반직 차석샘이 발령나면 신규9급 분들이오셔서 늘 옆에서 신규업무를 가르치는 담당자가 되다보니 제 업무는 늘 뒤로 밀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도 업무 하나하나에도 책임감을 가지며 열심히 행정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30년 가까이 일하고 9년 일한 임금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서러움이 밀려옵니다. 그것도 9호봉의 100%가 아닌 이상한 보수체계,,, 지금 행정사무원이 요구하는 사항은 단 한가지 경력 100%입니다. 하지만 “수용불가”라는 문구를 볼때마다 지난 28년간 일한 나 자신에게 미안해 지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렇게 욕심 부릴꺼면 당당하게 공무원 시험보고 들어오라고 누군들 그렇게 하고 싶지 않겠습니다.
저는 말합니다.
왜 공무원 시험을 보지 않았겠냐? 먼 과거 초등학교 근무하셨던 육성회직원분들은 자동으로 기능직 사무원으로 이직을 하고, 이직후 사무운용직을 거친분들은 교육행정의 시험을 응시할 자격이 주어져 전직하신분들이 많습니다. 이렇듯 저희도 똑같이 시험볼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공무원을 시켜달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저 일한만큼의 경력과 호봉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일까요? 저희 행정사무원의 요구사항을 잘 살펴봐주시고 “수용불가”가 아닌 한번이라도 “검토”를 지나“수용”이라는 문구를 보고 싶은 마음을 간절히 담아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학비노조 간부님들 저희 조합원을 위하여 굳은일도 서슴치 않고 앞장서 주시는 정성에 감사드리며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권점늠 / 근지구력
근지구력
국민체력검진 미화원에게 꼭 필요한가
청소미화노동자 권점늠
“어머니 뭘 그리 유심히 보셔요”
책꽃이를 정리하다
제 가 21-4- 오산- 01125 호 참가증, 성명: 권점늠, 생년월일 :1955년 10월 12일 위 사람은 국민체력 100사업 체력인증에 참가하였기에 이 증서를 드립니다.
측정일 : 2020년 1월 29일
출력일 : 2020년 1월 29일
서울 올림픽기념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 직인이 꽉 찍힌 참가증을 보며 겸연쩍게 웃어본다.
이의 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교육공무직으로 입사하여 2015년~2020년 까지 5년을 다니다 퇴직을 권고 받았다. 학교 특수직으로 일을 하고 싶으면 체력검진 3등급은 받아와야 할 수 있다고 행정실에서 이야기했다.
비록 이순이 넘은 나이지만 꽃처럼 고운 학생들, 예쁘고 든든한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에서 5년 동안 다니면서 힘든 것보다 보람을 느끼며 출퇴근했던 나날들, 아침이면 여행 가는 것처럼 분주히 출근하고 하루가 한 시간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들 오후엔 또 여행에서 돌아오는 것처럼 차에 올라 30여 분 차를 타고 가로수의 푸르름도, 창가를 스치는 도심의 경관을 바라보며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다니던 일터를 떠나려니 왠지 서운한 마음에 자식들의 만류에도 다시 다니고 싶은 마음에 체력인증서를 받아오려고 세 번을 도전해 보았지만 원하는 3등급을 받지 못했던 기억이 고개를 내민다.
사 남매 자식들 키우며 분주하게 내 사업할 때는 한가로이 나들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언제 저렇게 다닐 수 있을까 부러웠다. 막상 자식들 뒷바라지하여 제각기 새로운 둥지 틀어 날아가고 이젠 여유롭게 살만하니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되었다, 짝 잃은 기러기처럼 혼자 남은 외로움을 학생들을 바라보며 보낸 5년이 금방 지루하지 않게 지나간 나날이었다.
교육공무직으로 근무할 땐 병원에서 건강진단서만 제출하고 다녔는데, 특수직으로 다시 일을 하려니 3등급 이상 체력인증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20대와 30대, 40대, 50대, 60대 체력에 구분을 두어야지 똑같은 종목을 시키는 것도 불만이다.
근력, 심폐지구력, 유연성, 민첩성, 손발력 모두 2등급 이상을 맞았는데 근지구력만 미달이었다. 이유인즉 3등급 윗몸 일으키기 9개만 하면 3등급 인증서 받을 수 있는데, 난 12번을 했다. 하지만 떨어진 이유인즉 복부 비만이라서 2등급인 윗몸 일으키기 13번을 해야 3등급 인증서를 줄 수 있다는 담당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너무도 합당하지 않은 부당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오산 두 번 충청남도 아산까지 갔었는데 이거 웬일인지 평상시에 없던 혈압이 올라 시험을 쳐 보지도 못했다. 이유인즉 긴장성 스트레스로 혈압이 일시적으로 오르는 사람도 있다고 담당 직원이 말했다. 저어 일하고 싶어 체력검사 하러 왔으니 통과시켜주면 안 될까요, 애원도 해 보았건만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로만 여겨졌다. 참가증을 보니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체력검진 다섯 종목 2등급 이상 맞았지만 복부 비만 있다고 윗몸 일으키기는 3등급은 9개만 하면 되는데, 2등급인 13개 못하고 12개만 해서 떨어졌다. 일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었다고 학비 노조에 전화했더니 김보섭 국장님이 교육청에 전화하셨다더니 다시 다니게 되었다. 1년이 지났다. 계약직이라 올해 1월에 또 오산 가서 혈압 올라 못 받았다, 아마도 지난해 행여 떨어질까봐 두근거리던 가슴이 체력센터에 들어서니 가슴이 벌렁거렸다. 또 떨어지는건 아닌가하고... 평상시엔 혈압이 정상인데, 아니나 다를까 혈압이 높아 검진을 못 받고 돌아왔다. 학교에서 2시간 외출 쓰고 택시비 25000원 들여 타고 갔건만 혈압이 말썽을 부려 이번에도 쓴 입맛을 다시며 돌아오는 발걸음은 천근이나 되는 듯 무거웠다. 일주일 뒤 다시 의사의 소견서를 받아 오산에 가려니 코로나로 체력인증센터는 문을 닫았다.
행정실에서는 다른 지역에라도 알아보라는 이야기를 했다. 딸에게 말했더니 “어머니 그냥 여가 활동이나 하고 쉬셔요” 한다. 다니고 싶은 맘을 헤아리며 집에서 몇 시간 가는 충남 아산 체력센터에 예약을 하고 딸이 직장 연차 쓰고 같이 가서 3등급 통과하여 지금까지 7년째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근력, 근지구력, 심폐 지구력, 유연성, 민첩성, 순발력 중 어느 한 부분이 좀 뒤떨어져도 육체적 건강에 별 지장 없으면 청소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평생 이순이 넘도록 해온 가사 일 여자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미화 일이라 생각한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수명도 점점 길어지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시대에서 일하고 싶어도 너무도 타당하지 않은 제재가 있는 느낌이 든다. 미스코리아를 뽑는 것도 아니고 일하려고 하는데 복부비만 있다고 2등급 받아야 3등급 인증서 발급받을 수 있다는 체력인증센터 직원의 말이 2년이 지난 오늘도 귓전을 울린다.
건강검진만으로 신체건강하다는 확인만 하면 되지, 이순이 넘은 사람들에게도 근지구력 외 근력, 심폐지구력, 유연성, 민첩성, 순발력이 다 3등급을 맞아야 일 할 조건이 된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기며 지면을 통해 내 의견을 말한다.
무력하게 노년을 보내기보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열심히 일하며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또 손주들에게 용돈이라도 주는 노후를 보내는 것이 아름다운 삶, 행복한 삶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손가락이 두 개만 있는 사람도 피아노를 치고, 두 손이 없는 사람도 차 운전을 하는 분도 보았다. 나이가 들어도 근지구력까지 다 양호하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여성들이 가정이란 울타리에서 자기 몸 가꾸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학비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면 요즘 코로나로 방콕 신세로 무기력하게 나날을 보낼 것이다
아침마다 출근하며 즐기고 하루를 학교 이곳저곳을 손주들의 방을 청소해 주듯 부산한 하루 한가로이 영화를 보며 휴일을 즐기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
삶이란 한가하고 여유로운 삶만이 행복한 삶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즐겁다. 무려 한 시간을 보내기보다 바쁘게 즐겁게 학생들이 뛰노는 천국 같은 꽃밭에서 함께 할 수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별꽃은 하늘에 피어 있어 가끔씩 쳐다보지만 학교에서 핀 꽃은 별꽃 같은 아름다운 꽃들이 운동장에도, 복도에도, 교실에도 바라만 봐도 내 마음속 가슴 가득 사랑꽃이 피는 느낌이다. 화장실을 막혀놓아도, 휴지랑 음료수병을 복도에 버려두어도, 푸른 숲길을, 푸른 바람을, 밝은 태양을, 흐르는 구름을 따라 함께 흐르듯, 오래도록 꽃밭에서 일하고 싶다.
옛 속담에 “아이는 울어도 귀엽고, 어른은 가만 있어도 밉다”란 말이 생각난다.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꽃들의 전당 건강지키며 오래도록 꽃들과 함께 사랑하며 지켜보고 싶다.
“해낸 것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들을 봅니다.”(미국 부통령의 말)
“훌륭한 타협과 훌륭한 법은 마치 훌륭한 문장과 같다. 는 말도 생각난다. 내 자식 키울 때는 하루가 한 시간처럼 바쁘게 살다 보니 자식들과 함께 할 시간도 없어 그저 밥 주고 학교 보내고 서로 마주 보며 웃을 시간도 많지 않았는데, 모두 들 성장해서 떠나가니 주위는 허전하다
우연한 기회에 미화원을 하게 되어 7년이란 시간을 함께하며 힘든 일 보다 더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는 듯 늘 꽃길을 걷는 것 같다. 이 느낌 오래도록 누리고 싶은 마음이다.
오래 살기보다 즐거운 일 하며 꽃같은 학생들을 바라보며 이쁘게 함께 웃고 싶은 생각이다.
젊은 사람들도 윗몸 일으키기는 많이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근지구력이 부족해도 이순이 넘은 사람들은 근지구력 좋은 젊은 층보다 청소는 한결 정성껏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이론과 현실은 상반 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요?
이렇게 지금껏 일할 수 있게 도와주신 삶에 활력을 갖게 해 주신 학비노조 김보섭 국장님께 감사한다.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곽영미 / 소통이 정답이다
소통이 정답이다
조리실무사 곽영미
급식소 분위기가 왠지 어둡다. 영양사의 무거운 발걸음이 일하는 우리한테까지 느껴진다.
유치원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조리사님, 실무사님 아무래도 고민 좀 하셔야겠는데요....”
“네 !!!! 그래도 설마 우리한테 먼저 의견을 물어보고 진행하지 않을까요??? 설마~~~~”
설마가 주는 느낌은 엄청나게 크게 현실로 다가왔다. 거의 18년 급식소 조리원 (처음 호칭)으로 근무하면서 맞이하는 변화는 전보라는 제도. 확신보다 두려운 감정이 앞서서 전보라는 체제가 우리한테는 넘 무서운 변화로 왔었다.
그 과정을 겪고 새로운 마음으로 배정받은 곳은 공립유치원... 하지만 학교라는 시스템은 모조리 버려야 했고 새로 배우고 익혀야 했다. 일단 늘 사용하던 기계사용법은 없어지고 새로게 배워야 했고 제일 황당하게 만든 시스템은 ‘간식’시간이라는 놀라운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점심 급식 시스템으로 전처리, 조리 , 배식, 청소 시스템으로 급식이 끝나고 나서는 정말 누가 옆에서 쓰러져도 모를정도로 각자 일을 해 나가기도 벅찼다.
하지만 여기 유치원은 학교 일은 똑같은데 청소 마무리를 1차로 하고 있으면 옆에서 두분이서 바로 간식에 들어가는 재료 또는 준비를 하면서 음식을 만들어 내야한다. 다만 급식은 각 반에 배달하는 형식이고 주어진 급식시간을 지내고 나면 다시 식판과 그릇을 수거해서 다시 청소를 해야하는 하루에 두 번의 급식을 하게 만드는 시스템에 너무 놀라웠다. 다만 내가 여기로 배정 받기전에 이런 시스템이 있다고 알려주거나 선택사항이 아니라서 어쩔수 없이 묵묵히 받아 들이고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낼려고 마음을 비우고 일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힘든 일도 알아주지 않으면서 방학때 급식이야기가 나오자 마자 앞이 캄캄했다. 뭐니 해도 급식소에서 일하는 강도가 너무 세다는 것이다.
일단 인원이 적어서 각자 맡아서 하는 일이 다른 학교랑 비교했을 때 너무 범위와 일이 많고 또 뭐니해도 같은 일을 두 번씩 한다는 것이 사람을 일에 쩌들게 한다는게 너무 컸다.
그런데 여기에 방학이라는 우리의 희망과 숨통을 트이게 하는 우리만의 휴식 공간이 없어지고 12달 계속 일하게 된다고 하니 캄캄할 수밖에.......
이런 일이 유치원 원장들의 모임에서 차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그러면서 점점 확정으로 이어진다고 하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
최종 합의를 다 본 상태에서 우리에게 의견을 물어본다고 오후 시간 짬을 내서 면담 신청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의 일 상태나 몸 상태를 묻기보다 어떻게 할거냐의 물음이 오히려 우리를 서럽게 만드는 상황이 되었다.
당연한 결과 “우리는 방학때 일하는걸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분들한테는 이런 결과가 황당했는지 교육청과 손을 잡고 다시 방학때 급식하는 방향을 다시 모색하고 있었고 우리의 눈치싸움은 힘겹게 이어가고 있었다.
교육청의 결과 각자 유치원 알아서 방학 급식을 추진하라는 이야기....
다시 한번 코로나19사태처럼 차별적인 대우가 우려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나 방향도 못 잡고 나만의 일이 것처럼 힘들어 할 때 노조측에서 손 빠르게 유치원의 영양사, 조리사, 실무사 등의 방을 만들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면서 서로 의견과 방법, 지금 우리가 처한 사항을 서로 공유하면서 의지하고 서로 뭉치는 계기를 보여 주었다.
교육청에 유치원 급식소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면담을 신청하고 모두 모이게 되는 순간은 오히려 우리의 존재가 너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어진 일이라고 하라면 해야하는가 보다’보다도 우리의 목소리도 낼수 있었어, 오히려 우리의 목소리를 그래도 귀담아 듣겠다고 교육청 각부서 실무자들이 나와서 우리의 고충을 듣고 있는 이 상황 마저도 그래도 우리가 잘 하고 있는거라고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 상황의 내용 중에 우리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말이 “그럼 월급을 고려하면 급식을 할 수 있는건가요?” 역시 원장 선생님과의 면담에서도 돈으로 우리의 급식행동을 알아보시려고 하던데 여기 교육청 실무자들도 돈으로 우리의 모든 행동을 결부 시키려고 하는 행동에서 마음이 많이 상했다....
우리가 왜 방학급식을 힘들어 하는지 뿌리부터 알고 시행와 면담을 해야 하는데 우리의 의견을 무시하고 알아보지도 않고 시행한 결과 교육청 유치원 원장과 대립은 예고된 법칙이었으리라.....
사람이 하는 일이다. 왜??? 어떻게???가 먼저가 아닐까........
유치원 방침은 항상 아이들이 우선이라며 우리보고 항상 아이들을 먼저 위하는 마음으로 급식소에서도 아이들에게 웃는 얼굴로 대하라고 하는데 그게 내 몸과 마음이 편해야 자연스러운 웃음과 행동이 나오는데 그냥 인위적인 행동으로 무슨 아이들을 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사소한 일인거 같지만 조금한 일에도 이제 관심과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돌아보게 된다. 방학 급식 방법을 찾는 과정이 우리한테 많은 혜택을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번 일로 인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 방침이 많이 참작되었다고 보여진다..,,
이번 일도 우리 모두 방향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 할 때 빠르게 행동으로 보여준 노조의 대처에 너무 감사하다...
조그만 촛불이 오히려 밝게 빛 날수 있는 횃불로 만들어 주었으니.......
어려운 일을 겪으므로서 그 사람의 됨됨이와 소중함을 느낀다는데 난 솔직히 이번 일에서 좀 등한시 한 경우에 속했다.
싫으면 다른데 전보 신청이나 하자고 ....
하지만 입원할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되어 제대로 업무보기도 힘든 와중에도 앞장서서 우리들을 하나의 집합단체로 만들어 주신 조희진 영양사님께 너무 감사하고 나의 마음상태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어 이번 사태에도 그래도 한발 나갈수 있게 해준것에 감사합니다.
어렵거나 해결이 막막할 때 우리 곁에서 도와준 노조분께도 너무 감사합니다.
막상 닥쳐봐야 그 존재를 안다고 하는데 이번일로 너무 그 존재의 고마움의 느낍니다.
앞으로 조그만 소망이라면 다치지 않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잘 보내고 정년퇴직하는 것이 바람이고 급식소에 관련된 일은 윗분들의 안일한 생각으로 실행에 옮기지 마시고 현장에 일하는 사람의 목소리부터 듣어주시고 같이 방법을 찾는 협조적인 관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닙니다.... 사람의 소리를 듣어주세요.....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우수상] 정수진 / 가지 많은 나무가 있어야 숲을 이룬다
가지 많은 나무가 있어야 숲을 이룬다.
조리실무사 정수진
올해 나이 44세, 한 남자의 아내이자, 중고생 딸 둘을 두고 있는 엄마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비정규직 노동자가 겪고 있는 희로애락을 품고 사는 평범한 노동자입니다. 평범한 노동자이지만 대한민국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는 특별한 면도 많기에 용기를 내어 도마에 칼질하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썰어 적습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거기다 두 아이의 엄마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지금 기억해보면 가장 가슴 분통 터졌던 것은 펜션이나 호텔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루에 13개 방을 일일이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입니다. 짧은 시간에 최대한 깨끗하게 해야 하므로 숨돌릴 새도 없이 손발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고생하고 받은 돈이 겨우 일당 5만 원이었습니다. 그조차도 ‘손님이 없다느니, 수입이 적다느니’ 하면서 일당을 떼이기 일쑤였습니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처지에 발만 동동 구르다 욕만 한 바가지 퍼주고 돌아서곤 했습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내가 잘할 수 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나에게 맞는 일을 고민하며 찾던 중에 학교 조리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리를 좋아했고, 또 학생들에게 맛있는 점심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일이라니, 저에게는 매우 적합한 일로 생각했습니다. 학교 조리 일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녔습니다. 신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행운이 저에게 찾아 왔습니다. 대체근무이긴 하지만 이 학교 저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마침내 2014년 거제도 모 초등학교에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기뻤습니다. 정식으로 출근하게 된 것도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당시 초등 2학년, 4학년)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들어오자마자 조리사 샘에게 ‘노조에 가입하면 모든 게 좋아진다. 꼭 가입해라’라는 말을 들었고, 큰 고민 없이 바로 가입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조리원으로, 조합원으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리원으로 아이들에게 맛있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해준다는 자부심이 컸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이다 보니 더욱 열심히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조합원으로는 옛날처럼 혼자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당했던 내가 아니라는 당당함이 정말로 좋았습니다. 그래서 경남교육청으로, 광화문으로 노동조합에서 하는 일이라면 두손 두발 걷고 참여했습니다. ‘노동조합은 쪽수다’라는 생각으로 내 한 몸이라도 보태야 힘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2017년이었습니다. 일명 ‘밥값 투쟁’!
밥을 짓는 조리원에게 밥값을 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교육청 관료들이 했을 때입니다. 이 말은 대중교통 버스 기사에게 버스비 내고 일하라는 것이고, 택시기사에게 택시비를 내고 운전하라는 것과 같은 참으로 어이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남 3,000여 명의 조리원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한 사람의 힘은 비록 적을지 모르지만 수천 명의 사람은 지세포 앞바다에 몰아치던 하나의 거대한 분홍파도와 같았습니다.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노동조합의 힘은 이런 것이구나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노조=빨갱이’가 아니라 ‘노조=우리의 삶이자 생명’이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습니다. 당시 교육청 관료들이 밥값을 내라는 말에 고된 일을 하면서도 모두 밥을 굶었습니다. 거기다가 외부음식을 아예 가져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느그들이 그리 나오면 차라리 굶는 것이 낫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2017년 밥값 투쟁은 우리가 이겼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당하게 대통령과 똑같은 정액 급식비 14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노동조합의 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동안 조리원은 조리 실무사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단순하게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 또한 높아졌습니다. 세월이 흘러 조합원이 된 지 7년 5개월이 되었습니다. 많은 것이 달라졌고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아직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많은 것이 좋아졌습니다만, ‘아직은’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학교 현장에는 여전히 차별과 부당한 처우가 계속되고 있고, 특히 조합원 사이의 갈등(?)이 다양해지고, 또 깊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장은 한마디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는 모양새입니다. 가지가 많고 잎이 많은 나무는 바람이 불면 잎이 흔들려서 잠시도 조용한 날이 없다는 뜻이지요. 학교 비정규직의 직종이 가지라면, 날이 갈수록 늘어난 조합원은 나뭇잎입니다. 조합원 직종이 다양해지면서 조합원의 요구도 천차만별로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또 예전과 다르게 현장에서 나오는 말은 ‘노조 하니 너무 좋다’는 말보다는 불평이 더 많습니다. 예를 들면 같은 학교 비정규직 조합원인 영양사, 조리사, 조리 실무사의 관계를 놓고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극히 일부분일 것이라 믿습니다.
학교 급식은 우리 아이들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먹여 튼튼하게 자라게 하고, 학생답게 주어진 공부를 잘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이 일에는 영양사, 조리사, 조리 실무사가 따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조합원임에도 ‘여사님,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일방통행입니다. 심지어는 ‘일하는 만큼 돈 받으라는 둥, 이거 해!, 저거 해! 라는 둥, 조리기구를 집어 던지거나 소쿠리 운반 카(일명 원카)를 발로 차는 둥’의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전보 발령을 받고 갔는데 아직 그 학교에 익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웠냐며 비아냥거리는 일도 있습니다. 정말 같은 배를 탄 조합원이라고 하기에는 서로에 대한 배려도 없이 너무 심하게 모욕감을 줍니다. 정말 아닌 건 아닙니다.
어느 날은 계란말이를 구웠습니다. ‘어떤 실무사는 1시간 만에 하는데 너희는 왜 1시간 20분이 걸리느냐면서 넌 능력이 문제가 있어’라고 할 때는 정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어느 날은 냉동 핫도그를 튀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속까지 튀겨지지 않는다.’라고 염려되는 부분에 대한 의견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뿐이었습니다. 결국, 핫도그가 제대로 튀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리사 샘은 ‘니 애 같으면 먹이겠냐?’라며 오히려 저희를 탓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학교에 들어온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핫도그를 먹지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노동조합이 차츰 안정화되자 집회가 있거나 하면 영양사·조리사 샘 중에는 ‘꼭 가야되냐?’고 은근히 활동을 못 하게 하기도 합니다. 영양사·조리사 샘이 행정상 조리 실무사에 대한 관리책임을 맡고 있다 보니 행정실이나 교장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만 그렇다고 같은 조합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안타깝고 어이없습니다.
이런 차별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이 악물고 조리 실무사로 당당하게 사는 이유는 이제는 중학생, 고등학생이 된 우리 아이들, 누군가의 아들, 딸들이 내가 지은 밥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든든하게 곁에 있는 조합원 언니들 때문입니다.
학교 안의 인간적 차별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 행정실의 예산 타령과 산업재해입니다. 현재 조리 실무사는 방학 중에는 비급여입니다. 그러다 보니 방학 두 달은 허리띠 바짝 동여매지 않으면 가정 살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학교 급식에 종사하는 직종이 영양사, 조리사, 조리실무사이지만 누구는 365이고, 누구는 방중 비급여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임금은 ‘노동력의 댓가’라고 배웠습니다. ‘노동의 댓가’가 아닙니다. 노동력의 댓가라면 당연히 방중에도 급여가 지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사, 행정공무원, 영양사, 조리사(일부)는 365 급여를 지급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나마 노동조합 투쟁 결과로 산업안전교육으로 일수를 추가해나가고 있긴 합니다만 행정실에서는 어떻게 하면 그 일수를 줄이려고 입만 열면 예산 타령을 합니다.
그리고 사망, 중상 등 중대 재해는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표가 안 나는 재해는 학교 안에서는 일상화되어있습니다. 이번에 발령받고 간 학교는 오븐 위에 후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오븐 위 후드가 없었다면 그 많은 유독가스는 어디로 빠져나갔을까요? 조리실무사가 수년 동안 마셨을 겁니다. 또한, 일과를 끝내고 휴게실에 앉으면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말이 ‘아이고 허리야, 팔이야, 다리야’입니다. 몸 곳곳에는 멍이 없는 날이 없습니다. 조리 실무사 배치기준이 100명당 1인(고등학교)이다 보니 음식량도, 노동강도도 장난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무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노동 조건에서 아프지 않고 일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이제 44세이지만 몸의 건강은 환갑이 넘은 것 같습니다. 어릴 적 할머니가 앉으면 ‘허리야, 다리야’ 하던 말을 지금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조리 실무사 경력 몇 년도 참 소중하지만, 조합원 경력 몇 년이 더 소중하게 다가오는 지금입니다. 권리를 찾는 것도, 아이들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먹이는 것도 혼자서는 안 되는구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의 탓으로만 돌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다니는 학교부터 다짐도 하고, 실제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첫 발령지 초등학교에서 요즘 3식 고등학교로 발령받고 한 학기를 보내고 방학을 맞이했습니다. 한 학기 동안 3식 고등학교에 가서 ‘탄력근무제’를 바로 잡고, 조합원이 미끄러져 다쳤던 곳인 바닥공사를 하게 했습니다. 이러면서 노동조합은 간부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 스스로 깨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직 학교는 울어야 젖을 줍니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교장도, 행정실장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노동조합에서 말하는 ‘정치’였습니다. 얼마 전 경남도의회 국민의 힘 모 도의원이 한 망언이 생각납니다. 방중 비급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 교육청에서 예산을 짰는데 ‘새 학기 맞이 급식 준비하는데 무슨 10일이 필요하냐? 하루만 하면 되지’라며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습니다. 만일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아는 사람이 도의원이었다면 그런 말을 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도의회에서 관철할 진보적인 도의원이 있어야겠구나’하고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치라는 게 멀리 있고,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압니다. 노동조합 처음 가입할 때 마음이랑 지금 ‘진보정치’를 하자는 마음이랑 비슷합니다. 기대 반 우려 반이지만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일이라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면 가야 할 길입니다.
100세 시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지만, 노동조합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잡은 손 놓지 않고 가고 싶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가 아니라 “가지 많은 나무가 있어야 비로소 숲을 이룬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습니다.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우수상] 안성미 / 그날 아침
그날 아침
조리실무사 안성미
그날 아침은 유난히 분주했다.
메뉴도 복잡했고 게다가 학부모들의 요구에 맞춰 초등저학년과 초등고학년의 맵기 정도를 달리하라는 작업 지시에 우리 학교 조리실에 있는 모든 솥단지들이 풀로 가동되었다.
우리 학교는 초중통합학교로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식사가 한 곳에서 조리된다.
어쩔 수 없이 어거지로 끼워 맞춘 조리실은 동선도 너무 멀고 작업공간도 충분히 확보되어 있지 못한 상태였다.
알고 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솥의 내용물을 옮길 때 솥의 걸쇠를 걸어 반드시 고정시켜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동료의 마음을. 작업공간이 협소해 아직 조리중인 메뉴를 위해서 빨리 비워주고 공간을 마련해 주려고 했다는 걸 말이다.
사고가 난 후 그 동료는 자신의 상처는 차마 보지도 못한 채 우리를 보고 미안하다고만 했다. 연신 미안하다고만 했다. 선생님께도 계속 죄송하다고만 했다.
장화에 들어 간 국으로 피부는 이미 종아리부터 벗겨져 흘러 내려 있었다. 동료는 신다 만 등산양말처럼 접혀서 포개있는 피부들을 차마 보지도 못하고 계속 미안하고 죄송하다고만 했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보다 우리들에게 미안하다고 연신 말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속상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동료의 상처를 미처 다 살펴보지도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남은 국을 담고 조리하다 만 메뉴를 완성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듯이, 마치 아이들이 이 사실을 알면 안 된다는 듯이 배식대에 서서 습관처럼 아이들에게 밝은 목소리로 ‘맛있게 먹어’를 하고 있었다.
가슴은 벌렁거리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 사이 동료는 119를 타고 오롯이 고통을 감내하며 쓸쓸히 병원으로 실려 갔다. 불안한 마음에 머리는 이미 하얘진 상태로 서로 조심하자고 독려하면서 그 날 일을 겨우 마쳤다. 사실 남은 일들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날의 떨리던 내 몸만 기억이 날 뿐이다.
그 날 일이 끝난 후 나는 허탈감에 빠졌다. 나뿐이 아니라 그 상황을 목격한 모든 동료들은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이 다가온 상황에서 일어난 사고라 식사 때를 기다리던 그 많은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작업 중지나 지연에 대한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정상적인 급식이 진행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퇴근 후 집에 돌아 온 나는 소파에 풀썩 주저 앉아버렸다. 어깨에 매어있는 가방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온몸의 힘이 빠져버렸다.
한참을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으니 가슴 저 밑에서부터 통증이 밀려왔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더니 어느 순간 난 누가 죽은 것 마냥 아무도 없는 집에서 펑펑 통곡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의 정상적인 식사를 위해서 내 동료의 고통과 두려움을 외면해 버렸구나.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상처도 보지 못하고 두려워 하던 다친 동료의 그 눈이 자꾸 떠올랐다. 이런 날은 정상적인 식사가 될 수 없는 날이었는데... 그날 배식대에 서서 습관처럼 ‘맛있게 먹어’라고 말한 내 입을 떼어버리고 싶었다.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서로 더욱 더 조심했지만 아직도 국 솥 앞에만 가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한동안 그 동료의 상처가 뇌리에서 벗어나지를 않았다. 그 동료의 상처는 날이 갈수록 더 짙어졌고 선명해졌다. 그럴수록 어마어마한 고통에 함께 해주지 못한 죄책감과 미안함에 내 마음의 상처도 같이 짙어갔다. 더 짙어지는 상처가 우리의 외면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더욱 아파왔다. 그 동료는 이식수술을 하고 나서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치료에 진척이 없었다. 결국 아물지도 못한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나마 집에 온 후 마음의 상처도 다리의 상처도 지금은 조금씩 호전되고 있다. 그 동료는 자기 상처의 치료보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면 일자리를 잃을까 봐 그 걱정을 지금 하고 있다.
그러던 중 얼마 전 화성의 모 고등학교에서 벽에 걸린 사물함이 떨어져 휴식중인 조리실무사 4명이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접했다. 9명의 조리실무사 중 4명이 다쳐 119에 실려 갔는데 그 날 5명의 조리실무사들과 대체인력으로 급식을 강행했다는 얘기였다.
그 날 다른 사고 없이 정상적인 급식이 진행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났다. 9명의 일을 5명이 나눠서 했다면 분명 일의 강도며 일의 집중도가 엄청났을 텐데, 게다가 아침에 큰 사고를 목격했다면 그때의 나와 같이 불안하고 떨리는 마음이었을 거라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그 중 한분은 중상을 입어 하반신 마비라는 중증이라는데... 아무리 대체인력을 투입한다고 해도 그 대체인력이 기존 인력을 대신할 수 없음이 당연한 것인데 인원수만 채웠다고 조리에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한 학교는 과연 할 말이 있을까?
내가 우리의 사고로 접했던 그 마음을 이분들도 경험했으리라 짐작하니 너무 화가 났다. 뉴스 기사로 사고가 난 휴게실을 볼 수 있었다. 9명이 다함께 앉아 있을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좁아 터졌고 열악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그 장소가 휴게할 수 공간이 과연 될 수 있을까? 그저 옷을 갈아입기 위한 탈의실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협소한 휴게실에 둘 공간이 없어서 벽 중간에 허술하게 옷장을 매달은 업체도 화가 나고, 옷장을 설치한 업체에 책임을 묻겠다는 진심 없는 도교육청도 짜증났다. 그런 상황에서 급식을 강행한 학교는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책임을 묻고 징계를 하면 하반신 마비를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분은 누구를 징계할 수 있을까? 과연 징계 할 곳이 있기나 한 건가?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만일 사고 상황을 아이들이 알게 되고 급식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학교를 탓했을까?
그런 결정을 한 학교는 과연 그게 최선이었을까?
우리는 그냥 급식을 위한 도구였던 것일까? 학교에서 나는 그저 도구였나?
아물고 있던 그 동료에 대한 죄책감이 다시 몰려왔다.
한 번도 난 내가 급식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난 그저 아이들에게 위생적이고 건강하고 이왕이면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맛있는 식사를 제공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이 일을 하는 분들은 모두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건 음식 만드는 걸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미래의 우리나라 주인들인 아이들에게 위생적이고 맛있는 음식을 내 손으로 먹이고 싶어서였다. 이왕이면 내가 잘하는 일로 보람도 느끼고, 수입도 생기면 좋으니까 다들 힘들다 만류했어도 도전해 본 것이었다.
이 일을 시작할 때 나의 자녀들도 학교의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였기 때문에 정말 내 아이를 먹인다는 생각으로 정성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마음 먹었던 것보다 일은 훨씬 험난했고 내 몸은 점점 더 망가져갔다. 학교는 안전하고 깨끗하고 반듯하지만 우리가 일하는 급식실은 사실 너무나도 치열했다.
퇴근이 빠르지만 일찍 출근하기 위해 남편 출근이며 아이들 등교준비를 새벽부터 미리 해야만 했고, 빠른 퇴근 후에는 정형외과며 한의원이며 근골격계 질환으로 병원들을 전전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오죽하면 매달 나오는 근속수당이 한달치 병원비라는 우스개 소리도 이제 농담이 아니었다.
쾌적하고 위생적인 작업장은 매일 작업 후에 독한 세제로 광내고 힘주어 수세미질 하고 뜨거운 물을 뿌려 유지해야 하고,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들도 매일매일 락스를 부어가며 물때가 생기지 않게, 음식물이 남지 않게 청결하게 유지해야 했다. 작업 중에는 팔팔 끓는 뜨거운 것들을 많이, 빠르게,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고, 작업장을 이동할 때는 기름이 튄 바닥에서 넘어지지 않게 발바닥에 힘을 주며 장화를 신고 뛰어 다녀야했다.
또, 주어진 재료로 최대한의 맛을 끌어내려고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여러 의견도 들어보고 하며 여러 번 손이 가게 정성으로 만들지만 식판에 담아 놓으면 볼품없어 보이기를 반복했다.
항상 조리 완료 후 2시간 안에 배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배식시간 전에 쫓기듯 조리를 완료해야만 했다. 배식 전 배식대에 서있으면 옷은 땀과 냄새로 쩔어 있고, 얼굴은 땀과 음식물 범벅에 미처 닦지도 못하고, 심장은 마치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난 듯 쿵쾅거리고 있다. 아이들이 내 앞을 지나갈 때마다 ‘맛있게 먹어’라고 내뱉는 말은 어쩌면 내 심장이 진정되기 위한 주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 배식이 끝나면 본격적인 우리의 2차전 100미터 달리기가 남아 있다. 엉망진창인 식판을 정리해서 세척실로 끌고 와 85도가 넘는 뜨거운 물과 세제로 불리고 1차 2차 3차까지 세척을 한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세척실에서 땀으로 따가워진 눈을 고무장갑으로 쓸어가며 다른 집기류와 도구들을 세척하여 마무리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원래 위치로 이동하면 2차 달리기가 끝이 난다.
식당과 작업장 불이 꺼져도 우리는 다시 마지막 3차전에 들어간다. 삶아서 세탁 한 수십장의 행주들을 널어 말리고 아침에 널어 두었던 빨래들을 뜨거운 소독고를 열어 정리한다. 그 와중에 한 번에 최대 3명씩만 샤워가 가능한 샤워실과 화장실에서 순번을 정해가며 샤워를 한다. 샤워를 하고 나와도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휴게실 온도와 습도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모두의 샤워가 끝나 가면 휴게실 온도가 떨어지고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는 병원으로 퇴근을 한다.
이런 하루하루 보내며 모두들 방학만 기다리고 있다. 방학이 되면 그동안 미처 치료하지 못한 근골격계 질병을 치료하고, 체력도 회복하고 다시 개학을 맞는다. 방학이면 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지만 이제는 근속 년수가 늘어갈수록 방학에 치료를 해도 질환들이 낫지 않게 되고 이제는 개학이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지 벌써 6년째지만 방학이면 통화하는 나의 부모형제들은 방학이라 일도 안하는데 월급 나와서 좋겠다는 말을 아직도 하고 있다. 매번 아니라고 12번쯤 말했지만 급식실 밖의 사람들에게는 나는 그저 부러운 학교근무자이다.
난 그래도 감사했다. 내가 일할 수 있고, 내 수입으로 가정이 좀 더 여유로워지고, 내가 잘하는 일도 할 수 있고, 이 나라의 주인인 아이들에게 내 정성을 전해줄 수 있으니 말이다. 내 몸이 망가져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지만 아이들의 ‘감사합니다’, ‘잘먹겠습니다’라는 스테로이드계 약보다 더 쎈 처방이 있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들이 반복되고 그에 따른 대처들을 보고 나니 난 나의 생각처럼 정성을 다하지도, 마음을 다해서 음식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최선을 대해도 나는 그저 급식을 위한 도구인데. 도구가 무슨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나? 내가 생각했던 사명감 따위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에 깨끗하고 안전하고 위생적이지만 그 걸 만들기 위해서 땀범벅이 되고 있는 우리들은 산업 현장보다 더 치열하게 작업하고 있는데, 교육기관들은 그저 사고가 안 나면 전혀 살펴보려 하지 않는다. 사고가 나지 않기 위해 우리들이 하는 그 많은 치열한 행동들이 결국 다 질병으로 오고 있는데 말이다. 부디 안타까운 일련의 사고들로 휴게실 환경이 개선되고 작업 환경들이 개선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급식을 위한 도구들이 아니라, 안전하고 즐겁게 엄마의 정성으로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는 100미터 달리기를 하더라도 그 앞에 기쁘게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