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공모전 입상작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 입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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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 학교 급식실 노동자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작품 응원 공모전 안내 ]
[ 학교 급식실 노동자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작품 응원 공모전 안내 ]
올해 7월 29일(월) ~ 8월 30일(금)까지 학교급식실 폐암대책위와 진보당 정혜경 의원, 더불어민주당 강득구, 김주영, 김태선, 문정복, 박해철 의원 공동주최로 진행한 [학교 급식 노동자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작품 공모전]의 수상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2021년 학교급식노동자의 폐암이 산업재해로 처음 인정된 뒤 2년 6개월 동안 113명 이상의 학교급식 노동자가 폐암 산재를 받았습니다.
환기설비 관련 점검에서 97.29%가 기준 미달이었으며, 이제 죽음의 급식실이라 불리우며 1천명 이상의 퇴사자에 인력난을 겪고 있습니다.
[학교 급식 노동자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작품 공모전]은 이러한 직업성 폐암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내어 사회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학교급식노동자의 폐암 근절을 위한 국가와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고, 급식노동자에 대한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시민들의 작품들이 웹포스터와 만화, 시 또는 에세이, 영상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제출되었습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공모전에 응모된 총 32건의 작품 중 대상 4분, 최우수상 12분이 입상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학교급식노동자의 산업재해 문제 해결을 위한 목소리에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노동조합에서도 학교급식노동자의 안전한 노동환경을 위해 더 힘차게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학교급식노동자 응원 작품 공모전 결과
대상(30만원)
초등
중등
고등
성인
태릉초등학교
정하진(그림)
방학중학교
황혜원(그림)
묵호고등학교
김용현(문학)
경상국립대학교
황서연(문학)
최우수상(10만원)
초등
중등
송정초등학교
박지은(그림)
인천아람초
홍지민(문학)
꿈키움중학교
채선우(문학)
민희주(문학)
녹천중학교
최가현(그림)
고등
성인
계산여고
주가은(그림)
마산 구암고
하다연(그림)
민하람(문학)
김호중
김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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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 초등부 대상_ 정하진(2017년생, 태릉초)
- 작품설명
: 급식노동자에 대한 뉴스 영상을 보고, 바꿔야 할 노동환경과 요구 사항을 생각하고, 행복한 급식노동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린 작품
- 선정 이유
: 어린이다운 귀여운 표현과 상상력으로 급식노동자 폐암 산재 재발방지를 위한 해결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이 참신함. 아마도 어린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금액일 “‘1억’ 같은 큰 투자”라는 구호는 직관적으로 사회적으로 충분한 투자를 해야 폐암산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공감을 일으킴.
◯ 초등부 최우수상_ 박지은(2013년생, 이천송정초)
- 작품설명
: 일하시느라 힘든 급식노동자분을 한 학생이 발견하고 그 학생의 관심으로 힘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 선정 이유
: 심플한 그림체에 깊이 있는 표현이 돋보임. 급식을 먹는 학생 등 많은 사람의 관심과 연대는 까맣게 병든 학교급식노동자의 가슴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힘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 초등부 최우수상_ 홍지민(2014년생, 인천아람초)
- 작품설명
: 더운 날씨에도 저희를 위해 고생하시는 아주머니께 급식을 먹으면서 항상 감사함을 느낀다고 전하고 싶었습니다.
- 선정 이유
: 매일 밥, 국, 반찬을 만들어 제공해주시는 급식노동자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잘 느껴지는 작품. 알록달록하게 채색한 시화로 작품의 매력이 한층 더해 짐.
◯ 중등부 대상_ 황혜원(2009년생, 방학중)
- 작품설명
: 저희의 두 번째 어머니처럼 매번 미소를 보여주시던 급식 선생님들의 아픔을 그렸습니다. 저에게 좋은 말만 해주시고 미소를 보여주시던 급식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급식을 만들어 주시면서 병을 갖게 되신 것이 마음이 아파 제가 급식 선생님들 덕에 기쁜 마음처럼 그분들도 부디 좋은 환경에서 건강하시게 일하시길 바라며 그리게 되었습니다.
- 선정 이유
: ‘포스터’라는 형식에 딱 알맞고, 완성도 있는 표현으로 돋보이는 작품. 조리흄이라는 학교급식실 폐암의 원인, 몸이 부서져라 고되게 일해야 하지만 그래도 어린 학생들을 대할 때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학교 급식노동자의 녹록치 않은 모습, 그리고 ‘미소 뒤에 아픔이 있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라고 함축적으로 표현된 연대와 공감의 구호가 한 장의 그림 안에 모두 잘 들어가 있음.
◯ 중등부 최우수상_ 채선우(2009년생, 경남꿈키움중)
- 작품설명
: 작품은 급식 노동자의 시점에서 전개됩니다, 단순 경제활동을 넘어 더운 급실식에서 몇시간식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 장면들을 묘사합니다. “점점 구워지는”이 문단 부터는 비유적으로 급식노동자들이 힘들다는 것을 표현 하였습니다, 작품의 의미는 급식노동자들의 힘듬과 처우를 개선하자는 의미를담아 비유법,묘사등을 사용해 표현했습니다.
- 선정 이유
: 시를 한줄 한줄 읽어내리면 급식노동자가 출근해서 노동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짐. ‘내 밥은 누가 해주는 걸까’라는 구절에서 노동자의 노동력을 완전히 끌어내어 쓰고, 책임은 외면하는 국가, 교육당국이 절로 연상됨.
◯ 중등부 최우수상_ 민희주(2010년생, 호수돈여중)
- 작품설명
: 학교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즐기는 점심시간의 행복 뒤에는 노동자분들의 고된 수고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그분들의 따뜻한 손길과 헌신을 기억하며, 폐암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맞서 우리 모두가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선정 이유
: 마치 학생들이 급식노동자에게 불러주는 노래 가사처럼 느껴지는 시 작품. 급식을 제공하는 노동자의 기여에 대한 인정과 이후 연대의 의지가 잘 표현되었음.
◯ 중등부 최우수상_ 최가현(2011년생, 녹천중)
- 작품설명
: 급식노동자에 대한 뉴스 영상을 보고, 느낀 바를 조리사 선생님께 쓰는 편지 형식으로 그린 만화
- 선정 이유
: (아마도) 좋아하는 웹툰의 캐릭터를 차용해, 급식노동자 노동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고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을 잘 표현한 작품
◯ 고등부 대상_ 김용현(2007년생, 묵호고)
- 작품설명
: 급식실 조리사분들이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감사합니다! 인 듯 하여, 시의 제목과 내용을 ‘감사합니다’로 표현했다. 시의 1연은 급식소 조리사분들이 일을 할 수 있는 학생들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적었고, 2연은 힉생들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듣기 위해 조리하다 폐암의 증상이 나타나는 조리사 분들을 표현했고, 마지막 연에서 ‘당신’은 무책임한 국가와 기관을 뜻한다.
- 선정 이유
: 시적 표현으로 우리사회의 학교급식실 폐암문제 해결 의지가 정말 있는지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음. 이번 공모전에 제출된 작품도 전체적으로 감사하다, 고맙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정말 감사합니까’라는 마지막 질문이 송곳처럼 박히는 느낌.
◯ 고등부 최우수상_ 주가은(2007년생, 계산여중)
- 작품설명
: 학교 급식 노동자 폐암 근절을 위한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제를 일러스트로 간단하게 그려 누구나 단번에 이해하기 쉽게 표현 했습니다
- 선정 이유
: 다양한 노동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는 그림. 마지막에 급식노동자와 학생이 함께 손잡고 문제 해결로 나아가는 모습이 명쾌함. 그림체와 채색 역시 깔끔하여 전달력도 매우 좋음.
◯ 고등부 최우수상_ 하다연(2007년생, 마산구암고)
- 작품설명
: 계속해서 개선되지 않은 환경으로 인해 검은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급식 노동자 모습을 그려 폐암에 걸리는 것으로 표현하였고, 그걸로 인해서 학생들이 영향을 받는걸 점점 검은색으로 바뀌는 급식판 하트로 표현하였다. 하트는 노동자가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 선정 이유
: 그림 자체의 완성도가 높음. 급식노동자와 학생의 모습을 잘 묘사함. 4컷 만화로 짜임새 있게 스토리를 구성했음. 폐암을 유발하는 환경과 폐암 산재 급식노동자의 가슴아픈 현실에 대해 비유적으로 잘 표현한 점이 인상깊음.
◯ 고등부 최우수상_ 민하람(2007년생, 호수돈여고)
- 작품설명
: 매일 우리의 식탁을 책임지시는 급식 노동자님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함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 선정 이유
: 국가와 사회가 급식노동자의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표현함.
◯ 성인부 대상_ 황서연(2003년생, 경상국립대)
- 작품설명
: 평생 나와 학생들의 식사를 차리느라 자신의 식사는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나의 어머니, 그리고 모든 급식노동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는 시.
- 선정 이유
: 급식노동자였던 어머니와의 구체적인 추억을 시로 녹여 표현한 점이 매우 인상깊은 작품. 어머니 혹은 급식노동자가 차려내는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짐. 시 전체적으로 아주 따듯한 위로의 마음이 느껴짐. ‘따듯한 한 끼’를 이제 내가 대접하고 싶다는 문구에서 연대의 마음이 잘 느껴짐.
◯ 성인부 최우수상_ 김호중(2005년생, 원광대)
- 작품설명
: 고된 일 속에서 받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 묵인하던 사회가 이번 일을 계기로 학교 급식노동자분들의 부당한 대우가 변화하기를 기원하는,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긍정적인 시
- 선정 이유
: 참신한 은유로 급식실에서 노동하는 이의 차림과 모습, 급식실의 상황, 그리고 병들어가는 육체를 표현한 것이 인상깊은 작품.
◯ 성인부 최우수상_ 김도희(2003년생)
- 작품설명
: 감사한 마음에 대한 보답
- 선정 이유
: 공모전의 취지대로 내가 직접 경험한 학교 무상급식, 내가 직접 만난 급식 노동자와의 추억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학교급식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주제의식를 잘 드러낸 에세이 작품. 급식실 도우미로의 경험과 매체를 통해 접한 급식실 모습으로 급식노동의 현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충격, 문제의식이 잘 표현되어 있어 이 글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학교급식 폐암문제 해결을 위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
<수상작 보기>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최낙숙 / 노조 활동 10년
노조 활동 10년
조리실무사 최낙숙
1. 학교생활 - 노동자의 삶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저는 한 초등학교 급식실에 취직했습니다.
제대로 된 근로 계약서 조차 읽어 볼 겨를도 없이 앞치마부터 둘렀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간 자리가 도저히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고 하며 반나절 만에 나간 빈자리였었습니다. 그렇게 고된 노동자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식들이 눈에 밟혀 지금의 저는 힘들지만 그저 묵묵히 버티는 것만이 길이라 생각했었던 어두운 날 들이였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 중 하나는 1650인분의 카레를 만들던 날 입니다.
제대로 된 지시사항 없이 레시피 하나만으로 가마솥 2개에 카레를 끓였지만, 저에게 돌아온 건 카레가 묽으니 책임지라는 질책뿐 이였습니다.
처음 당해본 상황에 저는 죽을죄를 진 냥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그 당시 이 말에 부당하다는 대꾸조차 해주는 동료도 없어서, 작업복도 벗지 못한 채 학교 근처 마트로 달려가 울면서 사비로 카레 가루를 사서 다시 끓였습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지금도 가족에겐 카레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급식실에서 온갖 설움을 견디고 악바리같이 버텨온 세월동안 제게 남은 건 망가진 허리와 붓기때문에 쥐어지지 않는 손 그리고 산재판정뿐입니다.
이런 서럽고 힘든 기억은 나혼자 만이 겪고있는 악몽이 아닐것입니다.
식판 수백 개를 나르는 카트 바퀴가 고장이 나도 예산이 없다는 핑계로 사람의 힘으로 끌게 하고, 무거운 밥솥을 혼자서 옮기고 쭈그려 앉아 바닥을 수세미로 닦아서 허리가 상하고, 온 몸이 골병이 들어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 급식실 노동자의 삶 입니다.
이런 현실속에 학교비정규직 노동조합이라면서 지금의 김진주 지부장이 학교로 방문을 왔습니다.
2. 노동조합 - 새로운 변화
2011.7.9일은 부산학비노조가 창립을 한 날입니다.
이날 저에게 노동조합의 창립선언문 낭독을 부탁하셨고, 그 결과 이필선 부지부장님과 같이 낭독을 하게되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학비노조를 시작 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노동조합을 시작 하면서 노동법을 처음으로 알게되었습니다.
노동법을 배움으로써 학교에서 무지하게 일을 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몸으로 때워야 하고,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관두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의 임금은 대략 3월 월급은 83만원 2월 월급은 22만원 이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임금이 방학때는 무노동 무임금 이라고 말했고 지금도 방학때 저희의 임금은 없습니다. 이런 악조건의 근로환경에 대해서 노동조합이 우리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임금도 인상했습니다. 누구하나 차별받는 일 없이 노동조합이 힘을 발휘해 주었습니다.
첫 시작은 노동조합단결투쟁으로써 명절수당 연 10만원을 쟁취한 것입니다.
이 명절수당을 쟁취하기 위해서 교육청 경비실 앞에 비닐로된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였습니다. 그러다 비가 오니 천막이 무너지기도 하고, 그 옆으로 쥐나 벌레가 기어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그 고난을 참으며 명절수당이라는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교육청과 싸웠습니다. 그 결과 명절 때마다 식용유 1세트뿐 이였던 우리에게 처음으로 명절수당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이 투쟁을 시작으로 위험수당, 정기상여금, 급식비, 근속수당, 맞춤형 복지비 등 을 쟁취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개선해야 할 사항은 많습니다. 더 나은 우리의 근무환경을 위해서 지금도 여전히 교육청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급식실은 1명이 수행해야할 업무가 과도하게 많기 때문에 배치기준 하향 촉구 및 노동개선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타 지역과 비교해 볼 때 부산은 학교마다 급식실 환경 조건이 다릅니다.
어떤 학교는 식당과 교실배식 혼용으로 시행하고 있고, 어떤 학교는 식당이 여러군데로 나뉘어져 있고, 어떤 학교는 공동배식을 하는 등 다양한 형태인데도 불구하고 전보를 강행하여 현장에 혼란만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으로 단결투쟁하여 현재 보다 더 나은 환경개선을 시행해야합니다.
노동 조합을 만나고 노조 활동을 하게 되면서 노조 전임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처음 전임 당시 옆에서 컨트롤 해주시던 분이 계셨는데 그 뒤에 혼자서 학교 방문을 하게 되니 참 두려움도 많았고 떨리는 순간도 많았습니다. 노조 활동을 하면서 많은 조합원들을 만났고, 그분들을 보면서 예전에 힘들었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울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우리 조합원들은 노동법을 잘 몰라서 학교가 시키면 다 해야만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배운 것을 하나라도 현장조합원에게 더 많이 알려주고 싶어서 하루에 서너군데를 다니다 보니 무릎 한쪽이 고장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법이나 자료를 알려주면 현장 많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아픔도 잊고 현장 방문을 더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 결과 많은 조합원들이 노동법을 알게 되고 그 결과 학교와 맞설 수 있게 되면서 더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런 가운데 18년도에 저에게 지부장을 하라고 말씀 해주셨을 때 저 같은 사람이 뭔 지부장이냐며, 지부장감도 아닌데라고 거부했었지만, 그래도 사무처 동지들과 조합원들을 믿고 지부장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또 한번 앞섰습니다. 하지만 여러 노동조합을 방문하고 타 노동조합 간부님들을 만나보면서 오히려 제가 많은 힘을 받았습니다. 또한 지부장, 그리고 간부로서 해야 할 일을 습득하고 노력하며, 현장을 더 열심히 방문해서 조합원을 만나고 알려주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임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은 조금 뒷전으로 미뤄졌던 것 같습니다. 지부장 시절에 시어머니와 모친을 만나지 못할 곳으로 보내드린 것이 조금 마음이 아려옵니다. 그래도 우리 4천 조합원들이 있기에 본분을 잊지 않고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지부장으로서 미약하지만 열심히 노력했었고 조합원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더 할 수 있습니다.
3. 후보출마 - 새로운 도전
50세에 노동조합을 만나고 57세에 지부장을 하게 되었고, 그 당시 민중당 부산 비례후보에 출마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산 전역 노동조합을 방문하면서 우리 학비를 알리고 비정규직을 알렸습니다. 그렇게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까지 여러 노동조합을 마주치게 되면서 나보다, 우리보다 더 열악한 환경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노동조합을 설립해서 학비처럼 되고 싶다는 노동조합도 만났습니다. 당선은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민중당을 통해서 더 많은 노동조합과 당원들을 만나면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후보 활동을 통해 알게 된 현실은 부자들만이 사는 세상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부속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였습니다. 그 사실이 참 서글퍼서 더 열심히 바꿔나가야겠다는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4. 현장결심 - 남은 도전
퇴직이 2년 남은 지금 저는 노동조합전임 당시 조합원들에게 노동법과 근로조건을 알려드렸으나 아직도 현장은 실현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배웠던 것을 직접 실천하기 위해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였습니다. 그 결과 학교 현장에서 행정실장과 직접 맞서기도 하였습니다. 사무처에서 알려주는 대로 실천 할 수 있으면 현장은 얼마든지 환경개선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많이 안타깝습니다. 단결투쟁하여 우리 학비노동조합이 하루 빨리 정규직화 되어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면 좋겠습니다.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임하정 / 비정규직에 이르기까지의 나의 삶
“비정규직에 이르기까지의 나의 삶”
영어회화전문강사 임하정
선생님,
처음에는 갑작스런 일이라 놀랐던 상황이 해를 넘어 계속되면서 이 시절을 더불어 새로운 삶의 방식이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제법 긴 단절의 시간을 지나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날들이 새삼 행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전에 우리가 나누었던 꽤 진지한 이야기를 넘어 저의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제 쉰 중반의 나이에 이른 저의 지나온 시절을 좀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때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유년 시절, 초. 중학 시절 우리 동네의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무슨 이유인지 술 없이 지내는 날이 없었고, 저와 동생들은 막걸리를 사러 주전자를 들고 외상술을 사러 매일 동네 점방을 다녔습니다. “외상이요.” 하는 말이 부끄럽고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즈음이면, 연달아 있는 동생들이 그 일을 이어서 담당하곤 했지요. 저는 아래로 네 명의 동생들이 있었으니 참, 다행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막내 동생을 낳으시기 하루 전날까지 왕복 4시간이 넘는 먼 길을 걸어서 겨우 빌린 남의 밭에서 우리가 먹을 감자와 채소류를 재배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가장의 할 일을 방관하셨고 한편 몸도 아프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남의 집 일을 하거나, 공사장에 가시거나 무슨 일이든 하셔서 겨우 우리를 먹여 살리셨습니다. TV도 없고 동네를 벗어나 본 적이 없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중학교에 가서야 친구가 사는 집에 가보니 아버지는 직장에 다니시고, 어머니는 가사를 돌보시며 집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러온 우리들에게 과일과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셨는데, 명절이 아닌 평일날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게 신기했습니다. 그러니 중학교를 다닐 형편도 어려워서 지원을 받아 다녔습니다. 이웃의 언니들도 중학교를 졸업하면 다른 도시로 일하러 가거나 공장에 취직하러 가곤 했으니 동네에서 가장 형편이 어려운 우리집에서 제가 고등학교를 갈 때가 되니 이구동성으로 말렸습니다. 당시에는 마산 수출 자유 공단이 있어 그곳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한다는 말이 있어 지원하려고 했으나, 체격 조건이 맞지 않아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학교에 다니고 싶어하니 인근에 있는 방직공장에 취직을 하고 야간 고등학교를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그 겨울부터 공장에 갔는데, 아침 7시 30분까지 출근하여 저녁 7시 30분 퇴근하였습니다. 제게 주어진 일은, 실을 감는 것을 지켜보며 끊어진 부분을 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점심시간 때 외에는 화장실도 한번 가지 않고 제 자리에 서서 지켜보며 실을 이어주는 일을 했는데, 퇴근 때 다리를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며칠을 다리가 아파서 힘들어 했는데 옆에 일하던 언니가 약간의 요령을 알려주어 근무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월급을 받았는데 약 구만원 정도였습니다. 그때가 84년 2월이었고, 어머니는 처음으로 월급이라는 돈을 구경하셨습니다. 그 돈으로 쌀을 사고 그리고 제 입학 등록금을 대었습니다. 낮에도 컴컴한 공장에서 일을 하고 5시에 학교를 가는 길은 너무도 자유로운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가면 졸음이 쏟아지곤 했습니다.
입학 첫날 선생님이 임시 반장으로 임명해 주셨는데, 나중에 선거를 통해 반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영어를 좋아하여 항상 영어시간이 되면 아무리 졸려도 집중했고, 영어 선생님과 눈을 맞추며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공장은 일주일 단위로 주야간 교대를 했기에 어떤 때는 10시에 수업을 마치고 다시 공장으로 가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잠이 많던 제게 그 일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식품회사에 일당직으로 다니곤 했습니다. 그러나 제 사정을 잘 아시던 선생님께서 좀 나은 직장을 알선해 주셔서 실험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수질오염과 대기 오염을 측정하는 회사였는데, 저는 연구원들의 실험을 보조하고 실험기구를 세척하고 샘플 채취를 보조하는 등의 업무와 여러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연구원 선생님은 제게 앞으로 환경분야가 중요하다며 진로의 방향을 예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급여가 열악하여 오래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다른 곳을 주선해 주셨는데 지역에서 가장 큰 회사였습니다. 제 일은 총무부의 업무보조, 도서실 관리와 청소 등이었습니다. 직원들이 많은 회사였기에 할 일도 무척 많았습니다. 인사과 업무도 보조하므로 여러 직원들의 인사관리 카드와 급여 정리하는 일을 도왔는데, 많은 직원분들이 대학을 나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 주변에 대학은 나온 사람이라고는 학교 선생님들이 전부였는데, 그분들이 받는 급여는 당시로서는 굉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도 대학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회사에는 독일에서 기술자들이 오곤 했는데, 총무부에서 접대를 하므로 자주 커피를 들고 다니며 인사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는 정도의 인사를 영어로 하며 몇 마디를 주고받곤 했는데, 상사들은 칭찬을 해 주시며 “열심히 공부해서 영어 박사님이 되라.”며 진지하게 말씀해 주신 차장님이 계셨습니다. 또 공장장님께서는 매월 월급날 불러서 “노트 값 하라” 하시며 용돈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분들은 제 삶에 “희망과 꿈의 씨앗”을 주신 분들입니다. 겨우 야간고등학교 다니던 조그만 아이에게 너무나 큰 비전이라 할 수 있는 큰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제 가슴에 살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정식직원으로 채용해 준다고 했지만 저는 거절하고 진학을 하겠다며 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대입학력고사를 치렀고, 영문학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하였습니다. 재수를 할 형편이 아니어서 아는 선생님의 주선으로 과학실무원으로 취직하여 타지방으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급여는 교통비와 용돈정도였으나 대안이 없어 1년을 다녔습니다. 다시 1년은 공무원 시험을 볼까 하는 마음으로 독서실을 다니곤 했으나,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시 진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전문대학에 지원하여 합격통지를 받았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지만 저는 너무 기뻐서 며칠을 아침 일찍부터 걸어서 다녔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동생이 산업체 고등학교 다니면서 번 돈으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 시절 정말 공부를 잘하고 재능이 많았던 동생은 인문계 다니려고 모든 것을 다했는데 가정 형편 앞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려, 집을 떠나 노동의 현장으로 갔던 것입니다. 제가 방황할 때 동생은 그 힘든 수출공단의 현장에서 제가 견디지 못한 그 고된 현장을 지키며 주경야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들게 번 돈으로 제 등록금을 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학교 방송국에서 일하며 장학금으로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취직후 동생의 한 학기 등록금을 내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날의 감회는 오랫동안 가슴에 있었습니다. 동생과 제가 전문대학을 다니는 동안 엄마는 남의 집 일을 계속하시면서 저희를 뒷바라지해주셨고, 그 아래 동생들도 공부를 잘하여 힘들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대학 진학을 했습니다. 그토록 어려운 시절을 잘 견뎌내고 살아온 동생들에게 전우애를 느낍니다. 우리는 가난과의 긴 싸움을 하나씩 헤쳐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 후 결혼을 하여 첫 아이가 3살 될 무렵, 제법 부유해 보이던 시댁의 사업이 점점 부진해 보이며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시기로 보였습니다. 나는 남편에게 내 공부에 투자하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남편은 동의해 주었습니다. 드디어 나는 영어영문학과 편입 시험을 치르고 허가를 받았습니다. 33살이었는데, 교수님은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말씀해 주시며 공부할 거리를 많이 주셨습니다.
아침이면 도시락과 함께 아이를 내복 바람으로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는 학교로 갔습니다. 어린이집이 마치는 시각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퇴근하곤 했습니다.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제 형편을 아시고 응원과 도움을 주셨기에 난생 처음 영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영어를 좋아했지만 공부를 해 본적은 거의 없었으니 실력 있는 학생들 틈에서 죽기로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아이를 재우고 쪽지시험 준비를 하고, 과제를 하느라 새벽에 겨우 몇 시간 자기 일쑤였고, 시험 때면 두피에 뾰루지가 나서 베개를 벨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괜한 짓이 아닐까, 미쳤지, 하는 자괴감이 들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방학이 되면 그 모든 후회감이 사라지고 다시 후회하고 하면서 졸업을 했습니다.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는 것은 제게 마치 날개를 단 것처럼, 비상 할 수 있는 것처럼 좋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졸업을 하고, 시골 초등학교 방과후 영어 강사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수익자 개인 부담이 아니라 학교가 정한 강의료가 너무 작았고 방학이면 아예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학때 일을 그만두고 서울 한 대학교의 테솔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친정 어머니께 부탁 드리고 한달 동안 서울에서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남편은 그동안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영사기사로 취직을 해서 다른 지방에 있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여러 공부에 시간과 돈을 투자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울에서 한달의 시간이었지만 또 다른 배움을 경험했고 교수법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학원에 취직을 했는데 둘째 아이를 가진 후 입덧이 심하여 일을 접었습니다. 얼마 뒤 출산 후, 한 선배로부터 교육대학원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저도 지원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아기를 키우면서 공부하면 될 것 같아 지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둘째 아이가 백일 되던 날 시험을 보고 왔는데 어렵게 합격을 소식을 받았습니다. 교육대학원은 토요일 하루 종일 수업이 있었는데, 아기가 오직 엄마 젖만을 먹어서 수유시간을 지키지 못해 서로 힘들었습니다. 종일 굶었다가 엄마만 기다리는 아기를 만나면 자책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교육심리학 수업때는 젖먹이를 떼어 놓고 공부를 한다고 다니는 제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결단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많이 울었습니다.
3학기부터는 논문을 쓰면서 어머니께서 살림을 대신 돌봐주셨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의 화행 분석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저로서는 가장 많은 논문을 읽었고 시력이 저하되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 후 논문 발표와 함께 졸업을 했고, 남편은 젊은 나이에 퇴직을 당했습니다. 그곳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와 남편의 이해와 도움 없이는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내가 이룬 성취라고 여겼던 것들은 사실 가까운 가족의 도움과 협력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을 실은 쉰 살이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그러니 41살이 되어 학교에 취직을 했을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나는 삶의 파고를 잘 헤쳐왔고 노력을 해서 이른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퇴직을 당한 남편은 일자리를 알아보기위해 그동안 배웠던 자동차 정비나, 영사기사 일을 알아보았으나 입사할 수 있는 곳은 없었고, 아는 지인의 회사에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다가 결국 퇴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생활비가 절약 될것으로 여겨졌던 시골로 이사를 왔습니다.
제가 학교 근무를 시작하고 2년이 지난 후 였습니다. 그동안 저는 영어체험실 내국인 강사로 1년 단위 고용되었습니다. 첫해에는 그저 학교에서 일한다는것이 좋아서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다음 해 지자체로부터의 예산이 줄어서 제 자리는 사라졌고,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 덕분에 기간제 교사로 채용되어 1년을 지냈습니다. 그 후 이번에는 예산이 더욱 줄어서 원어민 두 분이 고국으로 가시고 저와 다른 한분이 체험실에 남겨졌습니다. 해마다 바뀌는 예산에 의해 겨울 방학 때부터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다 영어회화전문강사 자리가 나서 지원을 했고 그때로부터 매4년 마다 퇴사와 입사를 반복하며 시험과 계약을 치르며 저는 이곳에 근무한지 만 12년이 지났습니다. 많은 선생님들과 학년을 같이 보내며 학생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업무를 공유했습니다. 일을 통해서 존중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며 동료애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선생님들은 저를 비정규직 강사라기보다 영어 전문 선생님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사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저의 급여나 고용상황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기다리면 뭔가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는데,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없는 사람처럼 여겨진다는 것을 노동조합에 가입하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하면서 사회의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 알게 된 것입니다. 제 존재를 중심으로 사방을 살펴보고 좌우를 보게 됨으로 사회 구조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마치 갑자기 한국 사회에 내던져진 이방인처럼 저는 비로소 사회 현안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현실의 문제를 내 삶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최선의 노력으로 살아온 것처럼, 어느 누구도 잘못 살아온 결과로 비정규직의 굴레를 쓰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다 말할 수 없는 긴 사연들과 아픔들이 있는데, 과연 우리가 그 아픔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요? 그런 여유를 우리가 가지고 있을까요? 다른 분들은 또 다른 시련과 고통을 겪어왔고, 어떤 분들은 그것을 통과하여 정규직이란 타이틀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과연 그게 우리를 안전하고 행복하게 해 주고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다른 종류의 시험들을 지나왔습니다. 직장을 갖기 위한 채용 시험도 물론이지만, 살아가면서 선택의 기로에서 얼마나 많은 도전을 통과했는지 모릅니다. 삶의 문제에서는 정답이 없기에 우리는 나중에 삶에서 그 해답을 발견합니다. 때문에 선생님, 저를 그냥 제 존재로 인정해 주시고 존중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정규직 교사와 같은 종류의 시험을 볼 여력이 없고,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선생님”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과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영어 한 과목을 12년간 가르쳐온 저에게 전문성을 논하는 것은 부당하고 도를 넘은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동안 수업을 통해서 늘 자신의 수업을 관찰하고 반성하며 더 나은 수업을 위해 늘 열어 두고 공부해 왔습니다. 학생들과 잘 소통하기 위해 여러 공부를 해 왔고 선생님과도 이런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생각과 의견이 달라도 언제나 보내주신 지지와 응원에 감사드리며, 다음에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요청해도 될까요?
마당에 피어난 분홍빛 과꽃처럼 건강한 여름을 보내시길 빕니다.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이준길 / 正規직과 批正규직
正規직과 批正규직
운동부지도자 이준길
Why! 정규직이 되어야 하는가?
◎ 지도자에서 교육자로!
비정규직 학교지도자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나라 체육교육과 엘리트 교육현장을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엘리트란 학교 운동부를 이야기한다. 중학교 시절 체육 시간에 體育이라는 한자를 배웠던 기억이 난다. 體育은 한자 그대로 신체를 기르는 과목이다. 영어로는 physical education으로 이 또한 신체를 교육하는 것이다. 교육은 인간의 올바르고 행복한 삶이라는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최소한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엘리트 학생선수 육성은 신체를 교육하는 것으로 엘리트 ‘훈련’, ‘지도자’와 같은 단어를 ‘교육’, ‘교육자’라는 선택으로 바꾸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엘리트 선수 육성을 교육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전문적인 신체기능을 교육한다.
학교현장에서 엘리트 선수에게도 신체기능의 교육이 이루어진다. 이는 학교 체육과는 다르게 전문적인 기술 및 신체기능을 교육받음으로써 학교를 대표하고 나아가 지역과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로 육성되어 간다.
체육은 ‘신체활동’을 통해 행동 및 마음을 조절하는 능력을 기른다. 이를 바탕으로 건강한 신체와 정신은 사회구성원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역량이며 여기에 필요한 것이 이론 및 신체에 대한 교육이다.
엘리트 학생선수 교육은 특정 스포츠 종목의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 세심하며 구체적으로 뚜렷한 교육이 강조된다. 이 또한 체육수업과 같은 맥락으로써 필요한 자질과 역량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두 번째, 엘리트 선수교육은 전문적인 기술 및 근력(힘)의 움직임이다.
엘리트 학생선수 교육은 크게 신체의 교육과 인성교육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신체 교육은 전문 기술을 교육함과 동시에 특정 스포츠 종목에 적합한 근육의 성장 및 사용을 교육한다. 이와 같은 신체 사용은 이론으로 학습할 수 있지만 교육자가 직접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확연히 나타난다. 기술과 근력(힘)의 사용은 상황에 따라 전략적으로 다양한 변화가 필요하다. 엘리트 선수 교육과정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며 학생선수의 심리 및 정서적인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교류 또한 전문적인 선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세 번째, 품격을 갖추기 위한 행동 조절능력을 교육한다.
최근 도쿄올림픽에서 볼 수 있었듯이 최고의 성적만을 위해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선수들이 경기에 임하는 과정과 경기가 끝난 이후의 태도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것은 올바른 품격 즉, 인성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엘리트 학생선수 교육과정에서 인성 및 예절교육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나의 선수 시절 “훌륭한 선수보다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학생선수가 신체적 정신적 한계에 도달함으로써 나타나는 심신의 변화를 조절하지 못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도 볼 수 있다.
이처럼 학생선수의 문제 행동을 예방하고 교정하는 것이 엘리트 교육이며 청소년들의 긍정적인 에너지 발산을 위해 스포츠 참여를 권장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그뿐만 아니라 스포츠 경기에는 규칙과 스포츠 정신이 존재하며 스포츠 정신이 바로 인성 그 자체이다. 규칙을 준수하는 연습을 통해 사회구성원으로서 도덕적인 규범을 갖추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나타나는 엘리트 선수의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더욱더 인성교육의 접근이 필요하다.
학생선수에게 운동기능을 비롯해 인성교육과 같이 다양하고 전문성 깊은 교육이 필요하다. 이는 학생선수를 교육하는 교육자로 역량이 강화되고 발휘되어야 하며 ‘교육자’라는 인식을 통해 조금 더 성숙하고 연구하는 자세의 교육자로 나아가야 한다.
◎ 학교 체육과 엘리트 스포츠 살펴보기
첫 번째, 체육과 엘리트 스포츠의 이질성
학교 체육과 엘리트 스포츠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체육 교사는 임용시험을 통해 교사가 되고 학생선수 교육자는 전문스포츠지도자 자격증 취득을 해야 한다. 이질성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학교 체육은 정규교과 과정에서 출발하였고 엘리트 스포츠는 교육과정과 별개의 부서로 운영되며 과거부터 현재까지 소년체전과 전국체전이 중심이 되었다. 엘리트 스포츠는 학교를 빛내거나 학생선수들의 성과달성과 인기스포츠 위주로 운영이 되었다. 경기결과에 따라 엘리트 스포츠 부서의 존폐와 함께 엘리트 교육자의 불안정한 고용 형태를 볼 수 있다.
또 다른 이질성은 경기결과에 따른 보상이다. 엘리트 학생선수 감독(교사)은 진급에 관련된 점수가 부여되고 엘리트 학생선수 교육자는 소년체전과 전국체전을 통해 포상금이 지급된다. 반대로 경기 성과가 부정적일 경우 감독(교사)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지만, 학생선수 교육자는 직장을 잃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결국,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훈련과 처벌이 발생하는 ‘승리 지상주의’의 문제점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관심 밖의 체육과 엘리트 선수
2019년 OECD 주요국의 초등학교 의무교육과정 수업시간 비중 지표에 따르면 체육 및 건강 수업(시간)이 핀란드(9), 일본(10), 독일(11), 프랑스(13)으로 한국은 7시간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수치만 보아도 국내 체육 시간 및 건강에 대한 수업은 현저히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 지식의 교육과 동시에 평행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바로 신체 교육과 건강이다. 우리의 몸은 모두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와 같은 근육을 효과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건강한 정신과 신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체육 및 스포츠 수업과 같은 신체활동을 장려하는 교육 방향이 제시되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 경제가 빠른 성장을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한 것은 건강한 신체와 정신보다 업무수행 능력이다.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한 체육과 스포츠 참여는 경제 및 시간의 여유를 확보한 다음 여가로서의 참여가 이루어지게 된다. 결국, 높은 연봉의 대기업 또는 공무원이 되는데 필요한 과목이 교육현장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체육을 뺀 공부는 직장의 선택에 영향을 주고, 좋은 직장은 삶의 질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 학생선수 교육자로 살아가기.
학생선수 교육자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교육자의 권리를 획득하고 스포츠 선진국으로 가는 초석을 다지기 위함이다.
현장에서 학생선수들과 함께 호흡하고 실질적인 실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현재 체육 중학교 복싱부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새벽 6시에 훈련을 시작으로 오후 6시까지 전공 교육시간을 통해 학생선수를 교육하고 있다. 기숙사를 생활하는 점에서 24시간 선수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체육고등학교 출신으로 학교생활을 잘 알고 있으며, 불편함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정규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항상 함께 학생선수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크고 작은 보람을 느끼는 것은 내 삶에 있어 또 다른 즐거움이다. 운동선수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지도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나 또한 지도자가 되는 상상을 해봤으며 좋은 기회가 찾아와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학생들을 지도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이면에 현실적인 걱정은 최저시급에 근접하는 급여다. 생활비를 제외하고 적금을 넣어 결혼자금을 마련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어떻게든 아끼고 아껴서 생활하고 퇴근 후 야간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싶지만, 새벽 훈련이 있어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
경제적인 걱정이 앞서 학생선수 교육에 전념할 수 없는 현실은 안정적인 급여측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학생선수를 교육하는 것도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지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급여를 충족하기 위해 또 다른 직업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은 학생선수를 교육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허비하게 된다. 경제적인 안정보다 지도자로서 학생선수를 교육하고 육성하는 경험을 쌓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겠지만 현실은 경제적인 걱정을 안고 살아간다.
나는 최근 학생선수를 대상으로 ‘진로탐색 과정’의 연구를 진행했다. 결과에는 담지 않았지만 대부분 학생선수는 비정규직 지도자의 직업을 선택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정규직을 반대하는 공무원의 이야기는 우리가 정규직이 되면 후배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라고 한다. 요즘 학생선수들도 직업에 대해 빠르게 파악하고 흐름을 알아가고 있으며, 조금 더 안정적인 삶을 원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학생선수들은 공무원, 직업군인, 개인 사업을 생각하지 비정규직의 학생선수 교육자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점에서 간단히 진행되는 부분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권리 보장을 위한 정책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는 특정 집단 및 조직에서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닌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진행되어야 한다.
체육 정책으로 다양한 비정규직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이를 정규직으로 전환해 가는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흐름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경제적 안정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직업에 대한 자긍심, 애사심을 바탕으로 학생선수의 권리 보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학생선수 교육자의 안정적인 면은 학생선수에게 직⋅간접적으로 신뢰와 안정감을 공유할 수 있다.
◎ 승리 지상주의와 비정규직의 관계.
학생선수가 경험하는 교육의 의미는 모두 똑같이 전달될 수는 없지만, 학생선수에게 열정을 쏟은 만큼 빠르게 경기결과로 나타난다. 깊게 자리 잡은 승리 지상주의는 선수를 교육하는데 단 하나의 목표에만 몰입하게 만들었다. 특히 승리에 포함된 포상은 선수 및 교육자에게 적극적인 동기 부여는 되겠지만, 일회용 선수 및 지도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해 포상금이라는 맹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무차별적인 훈련은 부상, 은퇴, 폭력 등과 같은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상급학교 진학에 관여하는 과정에서 금전적인 보상을 요구하는 등 승리를 통한 포상금과 같은 대체보상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종합해 보면 지도자에서 교육자라는 인식변화와 명칭변경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는 전문적인 신체기능, 기술, 힘의 사용을 교육하고 있으며, 인성, 예절, 품격을 갖추기 위한 교육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자라는 명칭변경을 통해 학생선수를 교육하는 교육자의 직업 가치를 높임으로써 교육의 질 또한 높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현실적인 면에서 체육과 엘리트 스포츠의 이질성은 엘리트 스포츠가 좀 더 특별하고 특수한 부분임을 뒷받침해 줄 것이며, 체육 및 엘리트 선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변화를 위한 노력 또한 필요하다.
학생선수 교육자의 정규직 전환을 통해 경제적인 문제해결과 동시에 승리 지상주의에서 벗어난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 학생선수 교육자 환경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나무의 뿌리는 ‘교육’, 나무의 몸통은 ‘정규직이라는 직업의 형태’이며, 학생선수들의 경기결과는 곧게 뻗은 가지와 과실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질 높은 교육과 좋은 결과를 끌어내는 과정에 교육자의 안정적인 삶이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방애경 / 유치원교육실무원의 하루일과와 문제점
유치원교육실무원의 하루일과와 문제점
유치원교육실무사 방애경
학교비정규직 중 인천공립유치원에서 5시간 근무하는 교육실무원이라는 직종입니다.
학교내에서 제일 어린 만3,4,5세 원아들을 교원인 정교사들이 가르치는 일을 하시고, 우리 직종은 보조교사로서 교육지원과 급식차를 가지고 와서 배식하고 치우는 급식종사자 역할도 하고, 환겸미화원처럼 유치원 내 청소를 도맡아서 하고,원아 안전관리, 유치원 행사 지원 하기, 현장체험학습 교육 지원하기, 귀가지도 지원 및 생활지도 지원업무를 담당하는 직종으로 유치원 교육 과정이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게 지원하는 필수 인력입니다. 단순히 보조정도만 한다면 모르지만 하나에서 백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하는 유치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슈퍼우먼 만능 직종입니다. 이렇게만 설명을 하면 우리 직종의 업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감이 잘 오지 않으실 거 같아서 하루의 일과를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출근을 하자마자 유치원 현관에는 오전 간식이 택배처럼 와 있습니다. 들고 들어와서 간식 준비를 하려하면 교실에 먼저 와 있던 원아가 기다렸다는듯이 선생님 응가할래요 하면서 옵니다. 요즘 원아들은 뒷처리를 스스로 하는 원아가 별로 없기에 교육실무원이 도맡아서 합니다. 간식준비를 하는 중간에 원아들이 등교했다고 벨을 누르기 시작하면 원아 맞이를 해가면서 간식준비를 합니다. 간식을 각반에 넣어주고 원아들이 손을 닦으러 나오면 안전거리 유지하게 하고 깨끗이 닦게하여 교실로 들여 보냅니다. 간식을 나누어 주고, 먹다 흘리는 거 닦아주고, 다 먹으면 책상 위 아래 깨끗이 닦아주고, 간식그릇 정리하여서 가지고 나와서 깨끗이 설겆이해서 소독기에 정리해 놓기. 원아 가방에 있는 알림장 꺼내서 확인하고 정리하여 가방에 넣어주기, 바깥놀이 하는 날은 유치원 놀이터 청소하기, 원아 데리고 나갈 때 보조하기, 강당에서 체육활동하면 보조 지원하기, 독서실 가면 같이가서 보조하기, 거의 매일 교재 교구 제작하기, 그리고 제일 힘든일이 책이나 교재교구 청소용품 미술재료 등등 택배가 수도없이 오면 교육실무원이 다 정리하는 일처럼 되어 버려서 택배 정리정돈부터 박스 폐휴지장에 갖다 버리기까지 하고 나면 그야말로 노동의 한계가 옵니다. 물 한잔 마실 여유 조차 없고, 생리적인 현상도 참아가며 학습지원을 위해 교실에 들어가서 유아교육을 위해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급식소 복도에 있는 급식차를 끌고 와서 각반 교실 배식을 합니다. 급식차 정리를 하고, 급식판에 밥 국 반찬을 담아서 원아에게 가져다 주고, 교육실무원도 함께 급식을 먹습니다. 먹다가 반찬 모자란 게 있으면, 급식소에 가지러도 갔다와야 하고, 물 흘리고, 음식물 흘리면 닦아 주러 가야 하고, 그 와중에 응가 마렵다 하면 교육실무원이 거의 다 닦고, 처리를 해 줍니다. 급식을 다 먹으면 음식물을 국그릇에 담게하고 갖다 버리는 것은 교육실무원이 합니다. 급식 먹고 나면 급식소에서 가지고 온 모든 그릇에 담긴 음식물을 바구니에 담고, 급식판과 그릇들을 설거지 하기 편하게 정리를 해서 급식소에 갖다 주어야 합니다. 점심 먹고 난 교실은 책상을 걸레로 닦고, 바닥은 물티슈로 음식물 흘린 거 닦아주고, 마대질로 깨끗이 청소를 합니다. 그리고 양치하는 원아 잘 닦을 수 있게 도와주고, 칫솔을 닦아서 칫솔소독기에 넣어주어야 하고, 각 반에 있는 화장실 청소도 하고나야 점심시간이 끝납니다. 육아를 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유아들과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가장 열악한 근무환경이라 위장병을 달고 살며, 밥을 먹자마자 청소를 하니 항상 빨리빨리에 길들여진 로봇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점심시간이 후딱 지나고 하원시간이 되면 가방 정리 잘 되어 있는지 살펴야하고, 겉옷을 입히고, 가방 메주고, 실내화에서 실외화로 신는 거 도와주고, 하원을 도우러 교문에 나가서 하원을 시킵니다. 원아가 하원을 하고나면 교육실무원은 각반 청소, 복도 청소, 특별실 청소를 하고, 쓰레기 종량제와 재활용을 버리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고 퇴근 시간은 이미 지나 있습니다. 정교사의 업무까지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등 명확한 고유업무 없이 유치원의 모든일을 지원하게 되어 업무 강도가 상당하고, 이 많은 일들을 매일같이 반복해서 5시간안에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바쁘고 힘들지만 아이들과 생활하고 해맑은 아이들의 미소를 보며 미래의 교육에 일조한다는 자부심에 작은 월급이지만 만족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2014년부터 교육감소속으로 바뀌면서 수당신설등으로 더욱 좋아졌다는 말로 우리를 속이고, 계약서를 슬쩍 변경하였고, 제대로 읽어 볼 계약서도 못본 채 반강제적으로 도장을 받아갔고, 그동안 비례없이 받던 각종수당을 8분의 5로 받게 되는 차별을 당하며 비정규직중의 비정규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일을 겪을 때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노동조합에 우리직종이 있다는 걸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교육감 소속으로 무기계약전환 이후 근로기준법상 휴게시간을 준수해야 한다는 이유로 5시간 계약서를 5시간 30분 계약서로 변경 할 것을 인천시교육청이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회계직소속일때 단협안에 있는 학교회계직소속 8시간 근무자들에게 학교특성상(특약) 점심시간을 근무 시간으로 인정을 해 주어서 8시간안에 30분 휴게시간 적용한 것을 우리직종에게도 적용 해 주는 것으로 해석한 행정실에서 5시간안에 30분 휴게시간을 넣은 계약서를 써 준 것입니다.
2016년 4월6일 노동조합 집행부와 교육실무원 저를 포함한 3명의 선생님들이 용기를 내어서 직종교섭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었고, 내 근로계약서가 유리하면 변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인천시교육청의 답변을 듣게 됩니다. 너무나 기쁜 소식도 잠시 소속학교의 교장, 교감, 중간관리자의 협박에 못 이긴 교육실무원 선생님들의 70퍼센트가 계약서를 변경하였고, 유치원 업무 특성상 휴게시간을 제대로 보장 받지도 못하고, 유치원내에 휴게할만한 공간도 없기에 계약서에 있는 휴게시간 30분은 서류상 존재 할 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유치원에 30분 더 봉사하는 꼴이 되어 버린 상황입니다.
너무나 억울한 상황은 5시간 근로계약서에서 5시간30분 근로계약서를 협박으로 바꾸게 하려는 부분이었습니다. 직종교섭때 직종교섭으로 나섰던 저에게도 중간관리자의 협박이 있었습니다. 2012년에 입사하여서 5시간계약서 안에 휴게시간이 있었어도 유치원 원아들의 교육시간에만 근로하는 직종 특성상 쉬는 시간을 갖기 어려워서 정교사와의 친분때문이라는 나의 합리화를 시켜서 2016년 4월까지는 휴게시간을 갖지 않는 근무환경이었고, 학교내 관리자들도 누구하나 근로기준법상 위법이라 알려주는이도 없었는데, 근로계약서를 바꾸게 하려는 협박은 중간관리자들과 정교사들의 따돌림과 그동안 좋았던 사이가 갑과 을의 관계로 바꾸게 되는 직장내 갑질로 이어지더군요. 그래도 굴하지 않고 그동안 쉬지 못했어도 이제부터는 휴게시간을 갖겠다고 하니 유치원 중간관리자 얼굴이 굳어지더니 윗선인 교장과 교감선생님에게 전해지고 교실로 부르더니 교감선생님께서 너희들 계약서를 바꾸지도 않고 휴게시간까지 쉬면 앞으로 학교 다니는 동안 불합리한것들이 많이 생길거라고 되놓고 협박을 하더군요. 그순간 알았습니다 그동안 원아의 안전과 정교사의 안위를 위해 배려했던 마음이 아무 쓸데없는 내 처우를 하락시키는 일이었음을요.
그래서 답을 했습니다. 저는 내 근로계약서에 위배되는 일을 한 적은 없고 오히려 노동시간에 봉사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불합리해서 그만 두더라도 그렇게 아까운 직종이 아닙니다. 라고요. 몇 년이 지나고 보니 협박하던 관리자들은 자연스럽게 전보들 가시고, 협박받던 저는 그대로 내직종을 유지하고 있네요. 보조라는 이름으로 인권유린에 노동력 착취까지 당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인천시교육청의 인사권 경영권이라 하면서 2016년도부터는 유치원교육실무원에게 재배치직종이라면서 각반에 한명 있던 울직종을 6개반에서 한명 빼서 신설된 유치원으로 보내더니 매년마다 2017년엔 5개학급에서 한명빼서 신설로재배치 보내고, 2018년에 4개반에서 한명빼고, 2019년엔 3개반에서 한명빼고, 2020년엔 다시6개학급에서 또 한명을 빼고, 2021년도엔 5개학급에서 또 한명을 뺏고, 단설은 매년마다 교육실무원 인원을 감축하고 있습니다. 공립유치원이 감축되는 것도 아니고, 사립유치원 사태이후 교육부차원의 공립유치원 대폭 증설 계획이고, 공립유치원 증가는 사회적으로 볼 때 바람직한 방향임에도 교육청은 이러한 방향을 예측하거나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갑자기 학급수가 늘게 되자 허겁지겁 졸속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울직종은 몇 년전부터 유치원 상황에 따른 배치기준 마련을 요구 했으나, 암묵적으로 묵살하고, 유치원내 교육실무원만 감축시켜서 그 빠진자리의 노동력 증가를 오롯이 교육실무원이 감당하게 하는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원아 미달도 아닌곳에서 인원 감축을 해서 다른직종보다 처우하락으로 차별 당하고 있고, 신설된 유치원엔 신규채용도 없이 단협위반인 대체인력 기간제실무원만 채용하고, 근로장학생 청소용역투입으로 존재감 위기 조성에 고용불안과 존폐의 위기에 내 몰리게 되었습니다.
타지역에도 울직종이 있지만 다른형태의 직종을 만들어서 인천만 있는 직종(서울,부산은 울 직종이 있고 다른지역은 직종의 명칭이 다를 뿐)이라 하며 일몰사업으로 내몰고, 유치원의 원활한 운영과 타지역 보다 편안한 정규직의 안위와 품위유지를 위해 각반에 한명씩 채용하여서 유치원내 다양한 근무형태를 다 할 수 있게 부려 먹고는 이제와서 교육청의 예산 핑계로다가 한달 월급이 많지도 않은 직종에게 근거리에서 원거리로 강제 전보인 재배치를 보내고 있는 인천시교육청입니다.
이로 인한 노동의 강도가 살인적이고, 고용의 불안을 매년 받게 되는 직장갑질과 정리해고 수순에 맞서야 하는 인천공립유치원 교육실무원직종입니다.
교육현장의 약자인 우리는 쉴공간도 없는 근무환경에 자연감소 직종이라며 강제 전보를 보내서 고용의 불안과 강제 재배치로 빠진 교육실무원의 노동 강도를 남은 교육실무원이 하게 되어 살인적인 노동강도를 견뎌야만 하는 비정규직중 비정규직 차별 한파를 투쟁으로 견디어 보려고 합니다. 유치원 내에서 울직종에게만 희생과 차별을 언제까지 강요할까요? 몇 번의 면담과 직종교섭을 해야 인천시교육청이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 줄까요? 그래도 차별의 벽에 맞서 보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