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에 이르기까지의 나의 삶”
영어회화전문강사 임하정
선생님,
처음에는 갑작스런 일이라 놀랐던 상황이 해를 넘어 계속되면서 이 시절을 더불어 새로운 삶의 방식이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제법 긴 단절의 시간을 지나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날들이 새삼 행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전에 우리가 나누었던 꽤 진지한 이야기를 넘어 저의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제 쉰 중반의 나이에 이른 저의 지나온 시절을 좀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때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유년 시절, 초. 중학 시절 우리 동네의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무슨 이유인지 술 없이 지내는 날이 없었고, 저와 동생들은 막걸리를 사러 주전자를 들고 외상술을 사러 매일 동네 점방을 다녔습니다. “외상이요.” 하는 말이 부끄럽고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즈음이면, 연달아 있는 동생들이 그 일을 이어서 담당하곤 했지요. 저는 아래로 네 명의 동생들이 있었으니 참, 다행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막내 동생을 낳으시기 하루 전날까지 왕복 4시간이 넘는 먼 길을 걸어서 겨우 빌린 남의 밭에서 우리가 먹을 감자와 채소류를 재배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가장의 할 일을 방관하셨고 한편 몸도 아프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남의 집 일을 하거나, 공사장에 가시거나 무슨 일이든 하셔서 겨우 우리를 먹여 살리셨습니다. TV도 없고 동네를 벗어나 본 적이 없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중학교에 가서야 친구가 사는 집에 가보니 아버지는 직장에 다니시고, 어머니는 가사를 돌보시며 집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러온 우리들에게 과일과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셨는데, 명절이 아닌 평일날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게 신기했습니다. 그러니 중학교를 다닐 형편도 어려워서 지원을 받아 다녔습니다. 이웃의 언니들도 중학교를 졸업하면 다른 도시로 일하러 가거나 공장에 취직하러 가곤 했으니 동네에서 가장 형편이 어려운 우리집에서 제가 고등학교를 갈 때가 되니 이구동성으로 말렸습니다. 당시에는 마산 수출 자유 공단이 있어 그곳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한다는 말이 있어 지원하려고 했으나, 체격 조건이 맞지 않아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학교에 다니고 싶어하니 인근에 있는 방직공장에 취직을 하고 야간 고등학교를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그 겨울부터 공장에 갔는데, 아침 7시 30분까지 출근하여 저녁 7시 30분 퇴근하였습니다. 제게 주어진 일은, 실을 감는 것을 지켜보며 끊어진 부분을 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점심시간 때 외에는 화장실도 한번 가지 않고 제 자리에 서서 지켜보며 실을 이어주는 일을 했는데, 퇴근 때 다리를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며칠을 다리가 아파서 힘들어 했는데 옆에 일하던 언니가 약간의 요령을 알려주어 근무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월급을 받았는데 약 구만원 정도였습니다. 그때가 84년 2월이었고, 어머니는 처음으로 월급이라는 돈을 구경하셨습니다. 그 돈으로 쌀을 사고 그리고 제 입학 등록금을 대었습니다. 낮에도 컴컴한 공장에서 일을 하고 5시에 학교를 가는 길은 너무도 자유로운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가면 졸음이 쏟아지곤 했습니다.
입학 첫날 선생님이 임시 반장으로 임명해 주셨는데, 나중에 선거를 통해 반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영어를 좋아하여 항상 영어시간이 되면 아무리 졸려도 집중했고, 영어 선생님과 눈을 맞추며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공장은 일주일 단위로 주야간 교대를 했기에 어떤 때는 10시에 수업을 마치고 다시 공장으로 가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잠이 많던 제게 그 일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식품회사에 일당직으로 다니곤 했습니다. 그러나 제 사정을 잘 아시던 선생님께서 좀 나은 직장을 알선해 주셔서 실험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수질오염과 대기 오염을 측정하는 회사였는데, 저는 연구원들의 실험을 보조하고 실험기구를 세척하고 샘플 채취를 보조하는 등의 업무와 여러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연구원 선생님은 제게 앞으로 환경분야가 중요하다며 진로의 방향을 예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급여가 열악하여 오래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다른 곳을 주선해 주셨는데 지역에서 가장 큰 회사였습니다. 제 일은 총무부의 업무보조, 도서실 관리와 청소 등이었습니다. 직원들이 많은 회사였기에 할 일도 무척 많았습니다. 인사과 업무도 보조하므로 여러 직원들의 인사관리 카드와 급여 정리하는 일을 도왔는데, 많은 직원분들이 대학을 나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 주변에 대학은 나온 사람이라고는 학교 선생님들이 전부였는데, 그분들이 받는 급여는 당시로서는 굉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도 대학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회사에는 독일에서 기술자들이 오곤 했는데, 총무부에서 접대를 하므로 자주 커피를 들고 다니며 인사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는 정도의 인사를 영어로 하며 몇 마디를 주고받곤 했는데, 상사들은 칭찬을 해 주시며 “열심히 공부해서 영어 박사님이 되라.”며 진지하게 말씀해 주신 차장님이 계셨습니다. 또 공장장님께서는 매월 월급날 불러서 “노트 값 하라” 하시며 용돈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분들은 제 삶에 “희망과 꿈의 씨앗”을 주신 분들입니다. 겨우 야간고등학교 다니던 조그만 아이에게 너무나 큰 비전이라 할 수 있는 큰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제 가슴에 살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정식직원으로 채용해 준다고 했지만 저는 거절하고 진학을 하겠다며 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대입학력고사를 치렀고, 영문학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하였습니다. 재수를 할 형편이 아니어서 아는 선생님의 주선으로 과학실무원으로 취직하여 타지방으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급여는 교통비와 용돈정도였으나 대안이 없어 1년을 다녔습니다. 다시 1년은 공무원 시험을 볼까 하는 마음으로 독서실을 다니곤 했으나,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시 진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전문대학에 지원하여 합격통지를 받았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지만 저는 너무 기뻐서 며칠을 아침 일찍부터 걸어서 다녔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동생이 산업체 고등학교 다니면서 번 돈으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 시절 정말 공부를 잘하고 재능이 많았던 동생은 인문계 다니려고 모든 것을 다했는데 가정 형편 앞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려, 집을 떠나 노동의 현장으로 갔던 것입니다. 제가 방황할 때 동생은 그 힘든 수출공단의 현장에서 제가 견디지 못한 그 고된 현장을 지키며 주경야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들게 번 돈으로 제 등록금을 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학교 방송국에서 일하며 장학금으로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취직후 동생의 한 학기 등록금을 내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날의 감회는 오랫동안 가슴에 있었습니다. 동생과 제가 전문대학을 다니는 동안 엄마는 남의 집 일을 계속하시면서 저희를 뒷바라지해주셨고, 그 아래 동생들도 공부를 잘하여 힘들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대학 진학을 했습니다. 그토록 어려운 시절을 잘 견뎌내고 살아온 동생들에게 전우애를 느낍니다. 우리는 가난과의 긴 싸움을 하나씩 헤쳐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 후 결혼을 하여 첫 아이가 3살 될 무렵, 제법 부유해 보이던 시댁의 사업이 점점 부진해 보이며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시기로 보였습니다. 나는 남편에게 내 공부에 투자하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남편은 동의해 주었습니다. 드디어 나는 영어영문학과 편입 시험을 치르고 허가를 받았습니다. 33살이었는데, 교수님은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말씀해 주시며 공부할 거리를 많이 주셨습니다.
아침이면 도시락과 함께 아이를 내복 바람으로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는 학교로 갔습니다. 어린이집이 마치는 시각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퇴근하곤 했습니다.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제 형편을 아시고 응원과 도움을 주셨기에 난생 처음 영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영어를 좋아했지만 공부를 해 본적은 거의 없었으니 실력 있는 학생들 틈에서 죽기로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아이를 재우고 쪽지시험 준비를 하고, 과제를 하느라 새벽에 겨우 몇 시간 자기 일쑤였고, 시험 때면 두피에 뾰루지가 나서 베개를 벨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괜한 짓이 아닐까, 미쳤지, 하는 자괴감이 들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방학이 되면 그 모든 후회감이 사라지고 다시 후회하고 하면서 졸업을 했습니다.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는 것은 제게 마치 날개를 단 것처럼, 비상 할 수 있는 것처럼 좋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졸업을 하고, 시골 초등학교 방과후 영어 강사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수익자 개인 부담이 아니라 학교가 정한 강의료가 너무 작았고 방학이면 아예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학때 일을 그만두고 서울 한 대학교의 테솔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친정 어머니께 부탁 드리고 한달 동안 서울에서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남편은 그동안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영사기사로 취직을 해서 다른 지방에 있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여러 공부에 시간과 돈을 투자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울에서 한달의 시간이었지만 또 다른 배움을 경험했고 교수법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학원에 취직을 했는데 둘째 아이를 가진 후 입덧이 심하여 일을 접었습니다. 얼마 뒤 출산 후, 한 선배로부터 교육대학원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저도 지원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아기를 키우면서 공부하면 될 것 같아 지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둘째 아이가 백일 되던 날 시험을 보고 왔는데 어렵게 합격을 소식을 받았습니다. 교육대학원은 토요일 하루 종일 수업이 있었는데, 아기가 오직 엄마 젖만을 먹어서 수유시간을 지키지 못해 서로 힘들었습니다. 종일 굶었다가 엄마만 기다리는 아기를 만나면 자책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교육심리학 수업때는 젖먹이를 떼어 놓고 공부를 한다고 다니는 제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결단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많이 울었습니다.
3학기부터는 논문을 쓰면서 어머니께서 살림을 대신 돌봐주셨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의 화행 분석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저로서는 가장 많은 논문을 읽었고 시력이 저하되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 후 논문 발표와 함께 졸업을 했고, 남편은 젊은 나이에 퇴직을 당했습니다. 그곳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와 남편의 이해와 도움 없이는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내가 이룬 성취라고 여겼던 것들은 사실 가까운 가족의 도움과 협력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을 실은 쉰 살이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그러니 41살이 되어 학교에 취직을 했을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나는 삶의 파고를 잘 헤쳐왔고 노력을 해서 이른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퇴직을 당한 남편은 일자리를 알아보기위해 그동안 배웠던 자동차 정비나, 영사기사 일을 알아보았으나 입사할 수 있는 곳은 없었고, 아는 지인의 회사에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다가 결국 퇴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생활비가 절약 될것으로 여겨졌던 시골로 이사를 왔습니다.
제가 학교 근무를 시작하고 2년이 지난 후 였습니다. 그동안 저는 영어체험실 내국인 강사로 1년 단위 고용되었습니다. 첫해에는 그저 학교에서 일한다는것이 좋아서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다음 해 지자체로부터의 예산이 줄어서 제 자리는 사라졌고,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 덕분에 기간제 교사로 채용되어 1년을 지냈습니다. 그 후 이번에는 예산이 더욱 줄어서 원어민 두 분이 고국으로 가시고 저와 다른 한분이 체험실에 남겨졌습니다. 해마다 바뀌는 예산에 의해 겨울 방학 때부터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다 영어회화전문강사 자리가 나서 지원을 했고 그때로부터 매4년 마다 퇴사와 입사를 반복하며 시험과 계약을 치르며 저는 이곳에 근무한지 만 12년이 지났습니다. 많은 선생님들과 학년을 같이 보내며 학생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업무를 공유했습니다. 일을 통해서 존중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며 동료애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선생님들은 저를 비정규직 강사라기보다 영어 전문 선생님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사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저의 급여나 고용상황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기다리면 뭔가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는데,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없는 사람처럼 여겨진다는 것을 노동조합에 가입하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하면서 사회의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 알게 된 것입니다. 제 존재를 중심으로 사방을 살펴보고 좌우를 보게 됨으로 사회 구조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마치 갑자기 한국 사회에 내던져진 이방인처럼 저는 비로소 사회 현안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현실의 문제를 내 삶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최선의 노력으로 살아온 것처럼, 어느 누구도 잘못 살아온 결과로 비정규직의 굴레를 쓰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다 말할 수 없는 긴 사연들과 아픔들이 있는데, 과연 우리가 그 아픔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요? 그런 여유를 우리가 가지고 있을까요? 다른 분들은 또 다른 시련과 고통을 겪어왔고, 어떤 분들은 그것을 통과하여 정규직이란 타이틀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과연 그게 우리를 안전하고 행복하게 해 주고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다른 종류의 시험들을 지나왔습니다. 직장을 갖기 위한 채용 시험도 물론이지만, 살아가면서 선택의 기로에서 얼마나 많은 도전을 통과했는지 모릅니다. 삶의 문제에서는 정답이 없기에 우리는 나중에 삶에서 그 해답을 발견합니다. 때문에 선생님, 저를 그냥 제 존재로 인정해 주시고 존중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정규직 교사와 같은 종류의 시험을 볼 여력이 없고,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선생님”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과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영어 한 과목을 12년간 가르쳐온 저에게 전문성을 논하는 것은 부당하고 도를 넘은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동안 수업을 통해서 늘 자신의 수업을 관찰하고 반성하며 더 나은 수업을 위해 늘 열어 두고 공부해 왔습니다. 학생들과 잘 소통하기 위해 여러 공부를 해 왔고 선생님과도 이런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생각과 의견이 달라도 언제나 보내주신 지지와 응원에 감사드리며, 다음에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요청해도 될까요?
마당에 피어난 분홍빛 과꽃처럼 건강한 여름을 보내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