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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우수상] 정수진 / 가지 많은 나무가 있어야 숲을 이룬다

  • 학비노조
  • 1812
  • 2021-11-30 12:09:30

가지 많은 나무가 있어야 숲을 이룬다.
 
 
조리실무사 정수진
 
 
올해 나이 44세, 한 남자의 아내이자, 중고생 딸 둘을 두고 있는 엄마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비정규직 노동자가 겪고 있는 희로애락을 품고 사는 평범한 노동자입니다. 평범한 노동자이지만 대한민국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는 특별한 면도 많기에 용기를 내어 도마에 칼질하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썰어 적습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거기다 두 아이의 엄마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지금 기억해보면 가장 가슴 분통 터졌던 것은 펜션이나 호텔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루에 13개 방을 일일이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입니다. 짧은 시간에 최대한 깨끗하게 해야 하므로 숨돌릴 새도 없이 손발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고생하고 받은 돈이 겨우 일당 5만 원이었습니다. 그조차도 ‘손님이 없다느니, 수입이 적다느니’ 하면서 일당을 떼이기 일쑤였습니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처지에 발만 동동 구르다 욕만 한 바가지 퍼주고 돌아서곤 했습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내가 잘할 수 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나에게 맞는 일을 고민하며 찾던 중에 학교 조리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리를 좋아했고, 또 학생들에게 맛있는 점심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일이라니, 저에게는 매우 적합한 일로 생각했습니다. 학교 조리 일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녔습니다. 신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행운이 저에게 찾아 왔습니다. 대체근무이긴 하지만 이 학교 저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마침내 2014년 거제도 모 초등학교에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기뻤습니다. 정식으로 출근하게 된 것도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당시 초등 2학년, 4학년)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들어오자마자 조리사 샘에게 ‘노조에 가입하면 모든 게 좋아진다. 꼭 가입해라’라는 말을 들었고, 큰 고민 없이 바로 가입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조리원으로, 조합원으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리원으로 아이들에게 맛있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해준다는 자부심이 컸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이다 보니 더욱 열심히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조합원으로는 옛날처럼 혼자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당했던 내가 아니라는 당당함이 정말로 좋았습니다. 그래서 경남교육청으로, 광화문으로 노동조합에서 하는 일이라면 두손 두발 걷고 참여했습니다. ‘노동조합은 쪽수다’라는 생각으로 내 한 몸이라도 보태야 힘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2017년이었습니다. 일명 ‘밥값 투쟁’!
밥을 짓는 조리원에게 밥값을 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교육청 관료들이 했을 때입니다. 이 말은 대중교통 버스 기사에게 버스비 내고 일하라는 것이고, 택시기사에게 택시비를 내고 운전하라는 것과 같은 참으로 어이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남 3,000여 명의 조리원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한 사람의 힘은 비록 적을지 모르지만 수천 명의 사람은 지세포 앞바다에 몰아치던 하나의 거대한 분홍파도와 같았습니다.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노동조합의 힘은 이런 것이구나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노조=빨갱이’가 아니라 ‘노조=우리의 삶이자 생명’이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습니다. 당시 교육청 관료들이 밥값을 내라는 말에 고된 일을 하면서도 모두 밥을 굶었습니다. 거기다가 외부음식을 아예 가져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느그들이 그리 나오면 차라리 굶는 것이 낫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2017년 밥값 투쟁은 우리가 이겼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당하게 대통령과 똑같은 정액 급식비 14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노동조합의 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동안 조리원은 조리 실무사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단순하게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 또한 높아졌습니다. 세월이 흘러 조합원이 된 지 7년 5개월이 되었습니다. 많은 것이 달라졌고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아직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많은 것이 좋아졌습니다만, ‘아직은’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학교 현장에는 여전히 차별과 부당한 처우가 계속되고 있고, 특히 조합원 사이의 갈등(?)이 다양해지고, 또 깊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장은 한마디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는 모양새입니다. 가지가 많고 잎이 많은 나무는 바람이 불면 잎이 흔들려서 잠시도 조용한 날이 없다는 뜻이지요. 학교 비정규직의 직종이 가지라면, 날이 갈수록 늘어난 조합원은 나뭇잎입니다. 조합원 직종이 다양해지면서 조합원의 요구도 천차만별로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또 예전과 다르게 현장에서 나오는 말은 ‘노조 하니 너무 좋다’는 말보다는 불평이 더 많습니다. 예를 들면 같은 학교 비정규직 조합원인 영양사, 조리사, 조리 실무사의 관계를 놓고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극히 일부분일 것이라 믿습니다.
 
학교 급식은 우리 아이들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먹여 튼튼하게 자라게 하고, 학생답게 주어진 공부를 잘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이 일에는 영양사, 조리사, 조리 실무사가 따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조합원임에도 ‘여사님,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일방통행입니다. 심지어는 ‘일하는 만큼 돈 받으라는 둥, 이거 해!, 저거 해! 라는 둥, 조리기구를 집어 던지거나 소쿠리 운반 카(일명 원카)를 발로 차는 둥’의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전보 발령을 받고 갔는데 아직 그 학교에 익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웠냐며 비아냥거리는 일도 있습니다. 정말 같은 배를 탄 조합원이라고 하기에는 서로에 대한 배려도 없이 너무 심하게 모욕감을 줍니다. 정말 아닌 건 아닙니다.
 
어느 날은 계란말이를 구웠습니다. ‘어떤 실무사는 1시간 만에 하는데 너희는 왜 1시간 20분이 걸리느냐면서 넌 능력이 문제가 있어’라고 할 때는 정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어느 날은 냉동 핫도그를 튀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속까지 튀겨지지 않는다.’라고 염려되는 부분에 대한 의견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뿐이었습니다. 결국, 핫도그가 제대로 튀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리사 샘은 ‘니 애 같으면 먹이겠냐?’라며 오히려 저희를 탓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학교에 들어온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핫도그를 먹지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노동조합이 차츰 안정화되자 집회가 있거나 하면 영양사·조리사 샘 중에는 ‘꼭 가야되냐?’고 은근히 활동을 못 하게 하기도 합니다. 영양사·조리사 샘이 행정상 조리 실무사에 대한 관리책임을 맡고 있다 보니 행정실이나 교장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만 그렇다고 같은 조합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안타깝고 어이없습니다.
 
이런 차별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이 악물고 조리 실무사로 당당하게 사는 이유는 이제는 중학생, 고등학생이 된 우리 아이들, 누군가의 아들, 딸들이 내가 지은 밥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든든하게 곁에 있는 조합원 언니들 때문입니다.

학교 안의 인간적 차별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 행정실의 예산 타령과 산업재해입니다. 현재 조리 실무사는 방학 중에는 비급여입니다. 그러다 보니 방학 두 달은 허리띠 바짝 동여매지 않으면 가정 살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학교 급식에 종사하는 직종이 영양사, 조리사, 조리실무사이지만 누구는 365이고, 누구는 방중 비급여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임금은 ‘노동력의 댓가’라고 배웠습니다. ‘노동의 댓가’가 아닙니다. 노동력의 댓가라면 당연히 방중에도 급여가 지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사, 행정공무원, 영양사, 조리사(일부)는 365 급여를 지급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나마 노동조합 투쟁 결과로 산업안전교육으로 일수를 추가해나가고 있긴 합니다만 행정실에서는 어떻게 하면 그 일수를 줄이려고 입만 열면 예산 타령을 합니다.
그리고 사망, 중상 등 중대 재해는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표가 안 나는 재해는 학교 안에서는 일상화되어있습니다. 이번에 발령받고 간 학교는 오븐 위에 후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오븐 위 후드가 없었다면 그 많은 유독가스는 어디로 빠져나갔을까요? 조리실무사가 수년 동안 마셨을 겁니다. 또한, 일과를 끝내고 휴게실에 앉으면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말이 ‘아이고 허리야, 팔이야, 다리야’입니다. 몸 곳곳에는 멍이 없는 날이 없습니다. 조리 실무사 배치기준이 100명당 1인(고등학교)이다 보니 음식량도, 노동강도도 장난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무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노동 조건에서 아프지 않고 일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이제 44세이지만 몸의 건강은 환갑이 넘은 것 같습니다. 어릴 적 할머니가 앉으면 ‘허리야, 다리야’ 하던 말을 지금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조리 실무사 경력 몇 년도 참 소중하지만, 조합원 경력 몇 년이 더 소중하게 다가오는 지금입니다. 권리를 찾는 것도, 아이들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먹이는 것도 혼자서는 안 되는구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의 탓으로만 돌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다니는 학교부터 다짐도 하고, 실제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첫 발령지 초등학교에서 요즘 3식 고등학교로 발령받고 한 학기를 보내고 방학을 맞이했습니다. 한 학기 동안 3식 고등학교에 가서 ‘탄력근무제’를 바로 잡고, 조합원이 미끄러져 다쳤던 곳인 바닥공사를 하게 했습니다. 이러면서 노동조합은 간부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 스스로 깨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직 학교는 울어야 젖을 줍니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교장도, 행정실장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노동조합에서 말하는 ‘정치’였습니다. 얼마 전 경남도의회 국민의 힘 모 도의원이 한 망언이 생각납니다. 방중 비급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 교육청에서 예산을 짰는데 ‘새 학기 맞이 급식 준비하는데 무슨 10일이 필요하냐? 하루만 하면 되지’라며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습니다. 만일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아는 사람이 도의원이었다면 그런 말을 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도의회에서 관철할 진보적인 도의원이 있어야겠구나’하고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치라는 게 멀리 있고,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압니다. 노동조합 처음 가입할 때 마음이랑 지금 ‘진보정치’를 하자는 마음이랑 비슷합니다. 기대 반 우려 반이지만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일이라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면 가야 할 길입니다.

100세 시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지만, 노동조합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잡은 손 놓지 않고 가고 싶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가 아니라 “가지 많은 나무가 있어야 비로소 숲을 이룬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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