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공모전 입상작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 입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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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급식실 노동자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작품 응원 공모전 안내 ]
[ 학교 급식실 노동자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작품 응원 공모전 안내 ]
올해 7월 29일(월) ~ 8월 30일(금)까지 학교급식실 폐암대책위와 진보당 정혜경 의원, 더불어민주당 강득구, 김주영, 김태선, 문정복, 박해철 의원 공동주최로 진행한 [학교 급식 노동자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작품 공모전]의 수상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2021년 학교급식노동자의 폐암이 산업재해로 처음 인정된 뒤 2년 6개월 동안 113명 이상의 학교급식 노동자가 폐암 산재를 받았습니다.
환기설비 관련 점검에서 97.29%가 기준 미달이었으며, 이제 죽음의 급식실이라 불리우며 1천명 이상의 퇴사자에 인력난을 겪고 있습니다.
[학교 급식 노동자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작품 공모전]은 이러한 직업성 폐암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내어 사회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학교급식노동자의 폐암 근절을 위한 국가와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고, 급식노동자에 대한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시민들의 작품들이 웹포스터와 만화, 시 또는 에세이, 영상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제출되었습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공모전에 응모된 총 32건의 작품 중 대상 4분, 최우수상 12분이 입상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학교급식노동자의 산업재해 문제 해결을 위한 목소리에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노동조합에서도 학교급식노동자의 안전한 노동환경을 위해 더 힘차게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학교급식노동자 응원 작품 공모전 결과
대상(30만원)
초등
중등
고등
성인
태릉초등학교
정하진(그림)
방학중학교
황혜원(그림)
묵호고등학교
김용현(문학)
경상국립대학교
황서연(문학)
최우수상(10만원)
초등
중등
송정초등학교
박지은(그림)
인천아람초
홍지민(문학)
꿈키움중학교
채선우(문학)
민희주(문학)
녹천중학교
최가현(그림)
고등
성인
계산여고
주가은(그림)
마산 구암고
하다연(그림)
민하람(문학)
김호중
김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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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 초등부 대상_ 정하진(2017년생, 태릉초)
- 작품설명
: 급식노동자에 대한 뉴스 영상을 보고, 바꿔야 할 노동환경과 요구 사항을 생각하고, 행복한 급식노동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린 작품
- 선정 이유
: 어린이다운 귀여운 표현과 상상력으로 급식노동자 폐암 산재 재발방지를 위한 해결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이 참신함. 아마도 어린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금액일 “‘1억’ 같은 큰 투자”라는 구호는 직관적으로 사회적으로 충분한 투자를 해야 폐암산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공감을 일으킴.
◯ 초등부 최우수상_ 박지은(2013년생, 이천송정초)
- 작품설명
: 일하시느라 힘든 급식노동자분을 한 학생이 발견하고 그 학생의 관심으로 힘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 선정 이유
: 심플한 그림체에 깊이 있는 표현이 돋보임. 급식을 먹는 학생 등 많은 사람의 관심과 연대는 까맣게 병든 학교급식노동자의 가슴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힘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 초등부 최우수상_ 홍지민(2014년생, 인천아람초)
- 작품설명
: 더운 날씨에도 저희를 위해 고생하시는 아주머니께 급식을 먹으면서 항상 감사함을 느낀다고 전하고 싶었습니다.
- 선정 이유
: 매일 밥, 국, 반찬을 만들어 제공해주시는 급식노동자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잘 느껴지는 작품. 알록달록하게 채색한 시화로 작품의 매력이 한층 더해 짐.
◯ 중등부 대상_ 황혜원(2009년생, 방학중)
- 작품설명
: 저희의 두 번째 어머니처럼 매번 미소를 보여주시던 급식 선생님들의 아픔을 그렸습니다. 저에게 좋은 말만 해주시고 미소를 보여주시던 급식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급식을 만들어 주시면서 병을 갖게 되신 것이 마음이 아파 제가 급식 선생님들 덕에 기쁜 마음처럼 그분들도 부디 좋은 환경에서 건강하시게 일하시길 바라며 그리게 되었습니다.
- 선정 이유
: ‘포스터’라는 형식에 딱 알맞고, 완성도 있는 표현으로 돋보이는 작품. 조리흄이라는 학교급식실 폐암의 원인, 몸이 부서져라 고되게 일해야 하지만 그래도 어린 학생들을 대할 때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학교 급식노동자의 녹록치 않은 모습, 그리고 ‘미소 뒤에 아픔이 있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라고 함축적으로 표현된 연대와 공감의 구호가 한 장의 그림 안에 모두 잘 들어가 있음.
◯ 중등부 최우수상_ 채선우(2009년생, 경남꿈키움중)
- 작품설명
: 작품은 급식 노동자의 시점에서 전개됩니다, 단순 경제활동을 넘어 더운 급실식에서 몇시간식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 장면들을 묘사합니다. “점점 구워지는”이 문단 부터는 비유적으로 급식노동자들이 힘들다는 것을 표현 하였습니다, 작품의 의미는 급식노동자들의 힘듬과 처우를 개선하자는 의미를담아 비유법,묘사등을 사용해 표현했습니다.
- 선정 이유
: 시를 한줄 한줄 읽어내리면 급식노동자가 출근해서 노동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짐. ‘내 밥은 누가 해주는 걸까’라는 구절에서 노동자의 노동력을 완전히 끌어내어 쓰고, 책임은 외면하는 국가, 교육당국이 절로 연상됨.
◯ 중등부 최우수상_ 민희주(2010년생, 호수돈여중)
- 작품설명
: 학교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즐기는 점심시간의 행복 뒤에는 노동자분들의 고된 수고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그분들의 따뜻한 손길과 헌신을 기억하며, 폐암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맞서 우리 모두가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선정 이유
: 마치 학생들이 급식노동자에게 불러주는 노래 가사처럼 느껴지는 시 작품. 급식을 제공하는 노동자의 기여에 대한 인정과 이후 연대의 의지가 잘 표현되었음.
◯ 중등부 최우수상_ 최가현(2011년생, 녹천중)
- 작품설명
: 급식노동자에 대한 뉴스 영상을 보고, 느낀 바를 조리사 선생님께 쓰는 편지 형식으로 그린 만화
- 선정 이유
: (아마도) 좋아하는 웹툰의 캐릭터를 차용해, 급식노동자 노동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고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을 잘 표현한 작품
◯ 고등부 대상_ 김용현(2007년생, 묵호고)
- 작품설명
: 급식실 조리사분들이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감사합니다! 인 듯 하여, 시의 제목과 내용을 ‘감사합니다’로 표현했다. 시의 1연은 급식소 조리사분들이 일을 할 수 있는 학생들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적었고, 2연은 힉생들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듣기 위해 조리하다 폐암의 증상이 나타나는 조리사 분들을 표현했고, 마지막 연에서 ‘당신’은 무책임한 국가와 기관을 뜻한다.
- 선정 이유
: 시적 표현으로 우리사회의 학교급식실 폐암문제 해결 의지가 정말 있는지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음. 이번 공모전에 제출된 작품도 전체적으로 감사하다, 고맙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정말 감사합니까’라는 마지막 질문이 송곳처럼 박히는 느낌.
◯ 고등부 최우수상_ 주가은(2007년생, 계산여중)
- 작품설명
: 학교 급식 노동자 폐암 근절을 위한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제를 일러스트로 간단하게 그려 누구나 단번에 이해하기 쉽게 표현 했습니다
- 선정 이유
: 다양한 노동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는 그림. 마지막에 급식노동자와 학생이 함께 손잡고 문제 해결로 나아가는 모습이 명쾌함. 그림체와 채색 역시 깔끔하여 전달력도 매우 좋음.
◯ 고등부 최우수상_ 하다연(2007년생, 마산구암고)
- 작품설명
: 계속해서 개선되지 않은 환경으로 인해 검은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급식 노동자 모습을 그려 폐암에 걸리는 것으로 표현하였고, 그걸로 인해서 학생들이 영향을 받는걸 점점 검은색으로 바뀌는 급식판 하트로 표현하였다. 하트는 노동자가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 선정 이유
: 그림 자체의 완성도가 높음. 급식노동자와 학생의 모습을 잘 묘사함. 4컷 만화로 짜임새 있게 스토리를 구성했음. 폐암을 유발하는 환경과 폐암 산재 급식노동자의 가슴아픈 현실에 대해 비유적으로 잘 표현한 점이 인상깊음.
◯ 고등부 최우수상_ 민하람(2007년생, 호수돈여고)
- 작품설명
: 매일 우리의 식탁을 책임지시는 급식 노동자님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함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 선정 이유
: 국가와 사회가 급식노동자의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표현함.
◯ 성인부 대상_ 황서연(2003년생, 경상국립대)
- 작품설명
: 평생 나와 학생들의 식사를 차리느라 자신의 식사는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나의 어머니, 그리고 모든 급식노동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는 시.
- 선정 이유
: 급식노동자였던 어머니와의 구체적인 추억을 시로 녹여 표현한 점이 매우 인상깊은 작품. 어머니 혹은 급식노동자가 차려내는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짐. 시 전체적으로 아주 따듯한 위로의 마음이 느껴짐. ‘따듯한 한 끼’를 이제 내가 대접하고 싶다는 문구에서 연대의 마음이 잘 느껴짐.
◯ 성인부 최우수상_ 김호중(2005년생, 원광대)
- 작품설명
: 고된 일 속에서 받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 묵인하던 사회가 이번 일을 계기로 학교 급식노동자분들의 부당한 대우가 변화하기를 기원하는,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긍정적인 시
- 선정 이유
: 참신한 은유로 급식실에서 노동하는 이의 차림과 모습, 급식실의 상황, 그리고 병들어가는 육체를 표현한 것이 인상깊은 작품.
◯ 성인부 최우수상_ 김도희(2003년생)
- 작품설명
: 감사한 마음에 대한 보답
- 선정 이유
: 공모전의 취지대로 내가 직접 경험한 학교 무상급식, 내가 직접 만난 급식 노동자와의 추억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학교급식 폐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주제의식를 잘 드러낸 에세이 작품. 급식실 도우미로의 경험과 매체를 통해 접한 급식실 모습으로 급식노동의 현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충격, 문제의식이 잘 표현되어 있어 이 글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학교급식 폐암문제 해결을 위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
<수상작 보기>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우수상] 김은희 /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돌봄전담사 김은희
진달래가 부풀어 오릅니다
세상을 일으켜 세우는 노동자들
교육부에 앞마당에 꽃으로 피었습니다
던져 준 낱알 몇 개로 참아야 했던 굴종의 세월
울컥울컥 도지는 설움인 양
지나가는 폭우가 한바탕 땅을 칩니다
꽃잎 같은 숨소리를 내며
꿈이 커가는 아이들
그 중심에 우리들의 웃음도 또르르르 구릅니다
산다는 것은 때때로
풀잎의 잠을 풋풋하게 흔들어 깨우는 일
온기가 있는 꿈의 발자국이 어제보다 더 푸릅니다
마땅히 피어야 할 곳에 찬란하게 피어나
봄을 부르는 영광의 함성
비정규직의 벽이 천둥소리처럼 무너지고
희망의 소식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칠 것입니다
우주가 쿵! 흔들립니다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우수상] 김현희 / 나희 학교비정규직은 현재 진행중
“나의 학교비정규직은 현재 진행중”,,,
돌봄전담사 김현희
가정주부라면 다들 아이 키우고, 살림하고 가정에 헌신하면서 희생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세상의 두려움이 한참 몰려올 때 경력단절을 심하게 느끼고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다가 우연한 계기와 소개로 저는 초등학교 배움터 지킴이로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 키우면서 저만의 고집이 있었습니다. `품안에 자식이다` 씁쓸한 말도 있지만, 제가 직장 다니지 않는 이상 제 품에 더 오래 품고 싶은 생각에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늦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후에 아이들 하교시간에 잠깐 하는 배움터 지킴이 자리가 우연히 다가왔지만, 가정에서 내 아이들을 끼고 있으면서 엄마의 사랑을 듬뿍 주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결정하기 까지 망설였던 부분이였습니다.
배움터 지킴이를 시작하므로써 저의 결혼 후 직장생활은 다시 찾아 왔습니다.
학교안의 병설 유치원에 아이들을 보내고 저 또한 학교안에서 아이들과 같이 있다라는 생각에 점차 이 일에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고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저냥 하면 된다라는 것이 배움터 지킴이 일 이라고 들었는데 이건 제가 일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고 초등학생들의 눈과 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존의 일과 다르게 틀을 깨고 업무에 임했습니다. 아이들 하교 시간에 출근하여 일단 교통정리를 해야 했습니다. 문구점이 바로 길만 건너면 있는 상황이라서 아이들은 오직 앞만 보고 양쪽은 보지 않고 건너야 하는 위험한 도로가 있었기에 하굣길 교통단속을 1순위로 하고 그다음 학교내, 외곽 순찰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위험한 놀이터 놀이하는 아이들의 보호자역할, 어디를 가야할지 방향을 몰라 둥둥거리는 아이들 대신에 길 찾아 길동무 해주고, 친구들과 다툼이 있으면 중제 역할을 하여 다시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화합역할, 이런저런 아이와 관련한 학부모님들의 요청에 응답과 학교와의 정보전달도 해줘야 하는 정보매개체 도우미 역할까지, 저는 어떤 상황에서든 나타나서 아이들의 해결사가 되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엄마의 마음이 작용했겠죠.
운동장 안에서의 놀이는 안심할 수 있는데 운동장 밖의 아이들의 놀이는 당연히 위험했기에 신경을 곤두 세워야 했습니다. 사각지대을 중점 단속하면 4시간은 훌쩍 가버렸습니다. 아이가 수업도중 교실을 이탈해서 담임선생님과 함께 아이를 찾아 나서고, 또 자전거를 타고 강진 관내를 쏙쏙히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오직 아이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밖에는 아무생각이 없었죠. 학교안과 밖, 도로 주변, pc방, 아파트 놀이터, 외진 곳 등등... 차가 오는 도로를 금방이라도 건널려고 하는 아이를 뛰어가 덥석 안아서 데리고 왔던 기억, 이아들을 찾아달라며 제게 요청이 와서 함께 찾아 나섰던 기억이 생생히 지나갑니다. 다행히 무슨 일이 없었기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학교 일이라면 무엇보다 발 벗고 나서고, 큰 학교의 특성상 행사나 일 손도 많이 딸렸기 때문에 당연히 무엇도 바라지도 않고 내 일처럼 가서 도왔습니다. 노동의 댓가가 뭔지도 모르고 학교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니 마냥 즐거웠답니다. 배움터 지킴이를 2년 하고 나니 학교의 새로운 초등보육 선생님을 뽑는다고 해서 저를 이쁘게 봐주시는 교무실 선생님들의 응원으로 지원하여 2012년에 초등돌봄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직장들어오기 전에 보육교사 자격증과, 사회복지사 등 여러가지 자격증을 취득해놨기 때문에 자격은 되었던 거죠.
아이들과 친구처럼 잘 지내고 내 아이보다 더 많이 보듬어 줘야겠다라는 마음으로 현재도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토요일은 체험학습이 있어서 반나절 이라지만 하루를 올인 해야 하니 몸은 천근만근으로 힘이 들더라구요.
아이들은 하루종일 뛰고 소리치고 뒹굴어도 에너지 소모가 안되는데 우리 돌봄선생님들은 체력고갈이 오더라구요. 오전에 병원가서 물리치료 받고 찾아오는 두통에 약을 먹으며 버티어 나갔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경력단절을 겪다보니 제가 여기서 버티지 않으면 전 낙오자가 될 것 같아서 마음을 가다듬고 버텄습니다. 조금 힘든 체험학습이 토요일에 있어도 60시간을 초과하면 안된다고 하는 규정에 나머지 시간들은 봉사로 반납을 해야 했습니다. 박봉에 힘든 나날이였죠. 힘들어도 급여라도 보상을 해주면 더 나은데 하는 많은 회의감이 들어 서글픈 시간들을 참고 견디며 근무를 이어 나갔습니다.
정신없이 근무하다 보니 전남돌봄 들쓱날쑥한 시간도 천차만별, 소외감은 자존심과 함께 추락하고 학교에서는 별당아씨처럼 있는지 없는지 유령같은 존재처럼 전략해 버리고 물과 기름의 섞이지 못한 존재가 된채 시간제로 운영되는 돌봄은 학교 체험학습이나 행사가 있으면 관리자 맘데로 우리들의 시간을 농락했습니다. 어쩔 도리와 방법도 모르고 있었는데 학교비정규직 노동조합을 알고 노동조합을 믿고 들고 일어났습니다.
2015년에 노동조합을 가입하여 저는 강진 돌봄선생님들 중에서 최초로 가입했다는 이유로 강진돌봄의 대표직을 맡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리둥절 했지만 전남대표님의 소신과 강직함을 믿고 따랐습니다. 강진지역에서 몇 명 되지도 않은 선생님들을 모으고 힘을 합치고 우리들의 목소리를 내서 노동조합의 힘을 빌려 이야기 해보자고 하니 따르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끝내는 뜻을 함께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돌봄선생님과 합류를 못하고 지금도 따로 국밥처럼 들어오지 않고 있답니다. 열심히 목소리 외치고 해서 이룬 결과만 얻어 갈려고 하고 무임승차는 당연지사고, 앞에서 못하면 뒤에서라도 밀어주고 힘을 모아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선생님들이 정말로 얄미웠습니다.
대표라는 역할에서 이분들과 함께하고 싶은데 도저히 설득이 안 되었지만, 언젠가는 함께하는 동지가 되고 우리들의 마음을 알아 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에 비해 더 많은 노동을 해 왔고, 희생만 강요할 수 없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은 마음에 그동안의, 체불 임금건 소송을 걸어서 전남 최초로 받아내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노동조합에 가입 안 하신 선생님들은 체불임금을 받아준다니 귀를 열고 소리를 듣고, 그들의 비굴한 모습을 보았지만 그래도 그들만의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마음을 잡고 또 다 잡았습니다..
2017년 제 각각인 전남시간제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에 전남 대표진들은 주말마다 모였고 또 주중 번개팅은 기본이고 각지역 대표들은 평일이고 주말이고 아랑곳하지 않고 목포,순천,광주,장흥 노동조합사무실에 아무 때나 모여서 회의하고 마음을 다잡고, 고난이지만 행복한 고난에,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고, 잘 도착했다는 전남톡의 수신을 듣고 잠자리에 들어 또 내일 할 일을 꿈속에서 이야기 하곤 했답니다.
전남 돌봄선생님들의 노고와 희생이 아니였으면 이루지 못할 시간들을(2018년) 통일시키고 5, 7시간들을 이뤄냈습니다. 우리들의 아픔,깡,슬픔,분노,눈물이 이룬 결과였습니다. 전남 돌봄이 시간 안에서 서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저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우리선생님들과 노동조합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뤄내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 저는 대표자리를 물려주고 조합원의 일원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전남돌봄의 시간제 통일의 기쁨도 잠시 저는 5시간제 돌봄업무를 하고 있지만 큰 학교의 특성상 28명의 아이들과 함께 하려니 힘이 벅차고 아이들을 보는 시간안에 행정업무를 병행하다 보니 머리에 쥐가 납니다. 뭔가 대안이 필요했습니다.
교섭 때 한 교실당 적정 아이들 수는 23~25명 대안을 둔다고 하였지만 대기자가 있는 큰 학교라서 한 교실에 28명을 안 받을 수도 없고,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리다 보니 눈치를 안볼수도 없네요. 우리들도 여력이 되면 아이들을 다 안고 가고 싶지만, 그건 제 마음이지 다른 샘들게 강요할 수도 없고 현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행정업무 볼 시간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 보는 시간안에 간식짜고 서류일에 더불어 간식결제는 당연히 오전에 근무가 아닌 시간에 해야 하는 고충을 말도 없이 하곤 했습니다. 학교 관계자분들은 무엇만 해도 본인들 출장비 교통비 운운하는데, 저는 이런 잡음도 듣기 싫고 관내지만 나의 안전은 무시한 채 결제하고 간식준비 하로 다녔습니다.
하루는 생전처음으로, 느닷없이, 난데없이, 맹탕없이 행정실 직원이 와서 간식 염탐을 하기 시작하는데...
돌봄선생님들의 기분을 확 상하게 만들어 버려서 제가 행정실에 전화해서 그렇게 궁금하고 알고 싶고, 의문이 들면 염탐하지 말고 행정실에서 직접 확인도 하시고 간식 품의고 결제고 다 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도 행정실에서 간식 담당해주면 정말 감사하죠! 정식절차 밟아서 오셔달라고 했습니다. 저도 힘들다고 했네요. 3교실을 책임져야 하는거라 간식일이 보통일이 아니거든요. 마치 우리 돌봄샘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려고 하는게 너무 억울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답니다.
관계자분이 그 소리를 듣고 실장으로서 권한을 가지고 있고 당연히 알아야 해서 그랬다는데.. 그럼 방법이 틀린거죠. 그렇게 못 믿겠으면 처음부터 품의하고 검수까지 행정실에서 했어야죠. 직접 아이들을 보고 있는 우리 돌봄선생님들이 더 잘아서 아이들의 식성과 무얼 좋아하는지 균형있게 선별하고 있는데 돌봄선생님들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던 행동에 화가 많이 났었네요.
제가 한 소리 했다는 소리에 관계자분들 조회 시간에 돌봄 간식 이야기가 나왔답니다. 교감선생님이 우리를 불러서 이런저런 이야기에 서운치 마시라고 했지만 그건 갑질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상한 사람들로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우린 시간제, 우리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라는 잔제가 깔려 있었고, 무언의 무시가 느껴졌습니다. 너무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우리들의 자격지심에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닙니다.
그후에 서운했던 것 다 잊어버리라고 하더라구요. 당연히 행정실에서 알아야 할 권한이지만 정식절차를 밟아 주시라고 했습니다. 그 뒤 서로 오해도 풀고 현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때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들여졌다면 우리들에게 향한 의심과 눈초리는 부풀려져 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학교 일원으로 아직도 인정을 못 받고 살아 간다라는 게.. 소속감이라고 1도 없이.. 돌봄교실의 소중함도 알아야 하는데, 돌봄교실이 있어 학부모님들이 믿고 맡기는 안전한 곳인데, 학교는 오직 교사만 존재하는 공간인가요? 같은 중앙초인데 우리돌봄 아이들은 중앙초 아이들이 아닌 것 같은 느낌들? 5시간만 근무하고 가는 우리에게 무언의 멸시는 소속감을 갖고 싶은 계기를 만들어주는 저만의 오기였던 것 같습니다. 결코 저는 8시간을 갖고 싶은 마음으로 오늘을 달리고 내일 속에 날마다 침이 마르고 목이 세도록 외치고 기도합니다.
저는 5시간이라는 시간을 걸고 근무를 하지만 교육공무직 선생님들 중 교육복지사, 교무행정사, 상담선생들은 다들 8시간을 근무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정말 정말 부럽습니다!! 저도 8시간 할 수 있는데 왜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는지,, 전남도교육청과 교육부에 신문고를 두드렸고, 대통령님께 편지를 써서 돌봄의 상황과 전국 돌봄의 현황을 알렸지만 교육부로 이관되어 답변은 시,도교육청과 원활히 합의를 할 내용이라고만 답변이 오고 본인들도 그런 상황이 되면 협조 하겠다라는 형식적인 답변을 받고 실망이 컸습니다. 제발 이런 답변은 주지 말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책상 머리에 앉아 우리들의 노고를 알 리가 있겠습니까?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반영해야 하는 교육부는 서로 본인 업무가 아니라고 떠 넘기고 회피하는 일이 다였습니다.
돌봄의 국회토론회와 돌봄만의 투쟁을 거쳐서 서영교 국회의원도 만나 이야기 하고, 교육감 선거에 당연 조합원 선생님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돌봄선생님들의 노고가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노력 결과 교육감이 당선이 되었고, 약속은 당연히 지켜지리라 믿었습니다. 장석웅 교육감은 어렸을 적 옆집에 사시는 아재랑 똑같이 닮아서 친근감에 이분만은 꼭 당선시켜야 한다라는 열정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우리 교육감 뽑아 달라고 호소하고, 목소리를 높였던 일들이 스쳐지나 갑니다. 제가 봐도 정말 미쳤었죠!! 당선되니 다 잊어버리는 모르쇠 작전에 감탄했죠. 교육감을 닮은 옆집 아재도 조금씩 미움으로 바뀔려고 마음이 요동치기 까지 했네요.ㅋㅋ
옛말에 밭맬래? 애기볼래? 하면 둘다 마땅치 않지만 차라리 밭일한다고 하죠. 그만큼 아이 돌보기가 힘들다는 말입니다. 노동일인 밭매기도 정말 힘든데 밭일보다 더 힘든 일이 있었네요...
돌봄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이뻐하는 사명감이 없으면 절대로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곧 돌봄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엄마이기 때문이죠. 돌봄의 대책이 세워져야 한다고 전일제를 외쳤고, 행정업무를 가져와서 교사들의 수업을 방해할 만큼 힘들다고 한 일들 우리 돌봄 선생님들에게 시간을 주고 업무를 분리해주면 오죽 좋지 않겠습니까. 왜 간단한 것을 모르고 자꾸 헛발만 짚는지 모르겠네요.
8월4일 교육부는 초등돌봄교실에 관한 상황들은 발표했습니다. 확실히 시간이 풀린 전일제라는 말이 없어서 아쉬운 부분이 있었지만 각 시,도 교육청은 돌봄선생님들 그만 울리고 더이상 애태우지 말고 약속을 지켜서 아이들과 행복한 돌봄을 만들어가도록 지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랏돈 헛으로 야금야금 드시지 마시구요.
아이들이 있어서 행복한 돌봄교실 아이들의 따뜻한 엄마속 품처럼, 사랑과 기쁨으로 보듬고 어루만져주는 우리 돌봄선생님들이 있어서 든든합니다.
이런 찐 엄마 보셨나요? 뭘 더 저울질 합니까? 다른데 예산 내럭없이 쓰지 말고 진짜 쓸 곳에 알차게 쓰십시요! 저의 전일제는 소리높여 외치고 함께 힘을 모으는 투쟁으로 계속 될 것입니다. 학교의 일원으로 8시간 근무하고 인정도 받고 업무와 아이들 돌보는 2가지 일을 무엇보다 자신있게 잘 할 자신이 있습니다..
예쁜 이이들의 꿈을 소중히 키워가고 꿈을 이룰 수 있게 밑거름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에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정말 행복하답니다.
9월 2학기가 다가옵니다. 코로나로 힘들지만 우리 돌봄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코로나가 비껴가는 곳, 무적의 돌봄전담사 선생님들이 근무하는 곳, 다른곳은 다 비대면이여도 초등돌봄교실만은 항상 대면인곳, 이런곳인데 어떻게 강인해지지 않겠습니까? 귀신잡는 해병대 저리가라죠~
작년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돌봄교실 운영 했는데 2학기 절대 두렵지 않습니다. 당당히 헤쳐 나가봐야죠.
그리고 우리들 뒤에서 항상 지지해 주시는 노동조합 관계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낍니다. 궐기대회, 피켓선전, 총파업투쟁 기타 등등에 항상 솔선수범하여 챙겨주시고 애써주시고 어루만져 주신 따뜻하신 분들이 계시기에 노동조합의 손을 잡고 믿고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목소리를 내고 이뤄냈을까요? 가망택도 없었을 겁니다. 두말하면 잔소리구요.
관계자 선생님들 전국돌봄 안쓰럽게 봐주시고 항상 살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글쓰는 제주가 없어서 요리저리 횡설수설 했습니다.
전국돌봄이 상시 전일제로 통일되는 그날까지 외칩니다!! 투쟁!!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이 올 때까지~
노동조합 파이팅~ 그리고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최우수상] 이옥랑 / 15년차 비정규직 학교생활 레시피. 열정 양껏, 행복 맘껏. 쓰린맛 조금, 아린맛 조금.
15년차 비정규직 학교생활 레시피. 열정 양껏, 행복 맘껏. 쓰린맛 조금, 아린맛 조금.
특수교육실무사 이옥랑
# 선생님 책 읽어주세요
운동장에서 고추잠자리를 잡다가 교실로 들어갔을 때였나? 집에서는 수다쟁이. 학교에선 한마디도 않던 선택함묵 학생이 내게 입을 열었다. 순간, 그 아이의 입에서 쩍!!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선생님!! 책 읽어주세요.” 그때의 감동과 전율은!!!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 아이의 그 한 마디가 15년 동안 나를 있게 했다. 지금 생각해도 행복하고 보람찬 기억이다. 그러나!! 믿고 맡기셨다 생각했는데 ‘관망’이셨나 보다. 쉬지 않고 아이들과 놀아주다 맛보게 된 이날의 기억은 아픈 충고!!가 들러붙어, 행복과 쓰림이 세트로 떠오르는 추억이 되었다.
#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2007년 2월, 우리 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으신 특수교사 선생님이 내게 작별인사로 건넨 한마디 셨다. 순간, 얼어버렸다. 뭐지?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일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옮겨가서는 열심히 하지 말라는 말씀인가? 멘붕이었다. 해서, 나의 1년을 되돌아보았다. 특수학급 내의 수업시간엔 학생들을 거의 내게 맡기시고 선생님은 다른 수업을 준비하셨다. 선생님이 주신 문제집은 유치원 책이어서 풀고 나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나머지 시간은 동화책을 읽었는데 나 한쪽, 너 한쪽 읽기, 구연동화 들려주기, 동화 장면 그리기 등등.. 동화책을 가지고 한참을 놀아주었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원래 자기 반인 통합반으로 돌아가는데 도움반 친구들은 통합반 친구들에게 섞이지 못하고 도움반으로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나는 그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유치원 앞 모래밭, 소나무 아래 벤치, 덥거나 추울 땐, 도움반과 도서실에서 쉼 없이 재미나게 놀아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칭찬받아 마땅한데 “거기 가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 한 마디에, 나의 1년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듯, 너무 참담했고 ‘학교에서 나는 뭐지?’ 하며 내 정체성에 혼란마저 겪었다.
# 보조원
그런 충고를 들었음에도, 아이들 졸업식에 선물을 들고 찾아갔었다. 내 일을 너무 좋아하고 자랑스러워까지 했던 나는! 열정이 과한 특수교육 보조원이었다. 그랬다!! 그때는 직명도 보조원이었다. 보조원이 보조만 해야지, 아이들과 너무 주도적으로 학교생활을 한 것이 화근이었나 보다. 어쩔 수 없이 여기선 그리 뒀지만 다른 학교에 가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셨나 보다. 아이들과 책을 가지고 열심히 놀아주었고 그 결과, 선택 침묵 학생이 학교에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상을 받아 마땅한 나의 행동은, ‘보조와 지원’에만 그쳤어야 했는데, 첫 열정을 아이들에게 너무!!! 쏟아부은 실수를 하고만 것이다. 선을 지켰어야 했다. 가르치고 아이들에게서 성과를 내는 것은 교사의 업무이지 보조원의 업무가 아니었다. 그래, 내 잘못이다.
2021년 5월. 올해다. 고등학생을 맡아 지원!! 하는데 체조시간이었다. 아침에 새천년체조로 일과를 시작하는 체조시간이었는데 다른 반에, 다른 학년 학생들까지 갑자기 많은 아이들이 체육관에서 새천년 체조를 하게 되었다. 영상을 보며 체조를 하는데 갑자기 영상이 꺼지고, 음악만 나오는 상황에 모두 렉 걸린 컴퓨터 화면처럼 우왕좌왕 헤매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는 평소처럼 영상을 보지 않고 아이들과 체조를 하는데, 체조 순서를 외우고 있던 나는 “어깨돌리기~” 하며 평소 하던 대로 아이들 앞에서 체조를 하고 있었다. 순간 멈춰있던 체육교사에게 나의 행동은 교사처럼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단다. 이 사실을 우리 담임 선생님한테서 전해 들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영상이 끊겨 순서를 헷갈릴 때 앞에서 하고 있으면 힌트를 얻어 얼른 구령을 하며 아이들을 평소대로 지도하면 될 일이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건지 모르겠다. 같은 교사가 그리했으면 “언제 다 외우셨어요? 선생님 덕분에 잘 넘어갔어요.” 이렇게 웃으면서 넘길 일이다. 이게 뭐라고 “선생님, 아까 체조 때 하신 것은 앞으로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다. “선생님, 나는 늘 그렇게 하잖아요. 하던 대로 우리 반 아이들이랑 체조 한 거예요. 평소대로 한 건데요?” 했더니, “앞으론 그렇게 하지 마세요.” 한다. 너무 좋은 우리 담임선생님마저도 이리 말하는데, 기가 턱, 막혀서 너무 답답했다. 그런데, 더 기암할 일은 우리 특수교육실무사 실에서 이 상황을 얘기하고 의견을 묻는데 7명 모두, 내가 잘못했다는 것이다. 어떤 선생님은 그랬다. “과하게 뭘 하지 마!! 열정적으로 하지 마! 그렇게 하라잖아. 과하게 하는 걸 그들이 원치 않아!” 즉, 그들이 원하기에 보조라는 이름 안에 우리 스스로를 가둔 것이다.
법에 올린 문건을 만든 사람들이 보조원이란 통칭(명칭이 아니다. 각 치료사들과 함께 보조인력들을 통칭하여 보조원이라 기록한 것이다)과 업무내용을 법에 올리면서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직명도 보조원이라 법에 명시하고, 전국적으로 사용하게 했다. 1:1 맞춤교육계획을 세우고 교수활동을 하는 것은 교사의 업무이니, 보조원은 그저 특수교사의 지시와 관리에 의해 움직이는 감히!! 지도할 생각은 못하게, 그래서 특수교사와 부딪힐 일이 없도록 만든 것이다. 갑자기 일제 강점기의 우리의 얼(정신의 중심)마저 바꿔 지배하려 했던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이 생각났다. 내 생각이 너무 과한가? 아니다!! 생각마저 지배하려 했던 일본의 관리방식과 보조원이란 이름 안에 살아있는!! 사람을 생각 없는 죽은 사람으로 가둬버린 ‘그들’의 관리방식이 뭐가 다른가? 마음을 주고 정성을 다하여 아이를 돌보는 행동 자체를 ‘선을 넘는 행동,’‘지도’로 규정하여 ‘도발’로 보도록 만들어 버린 것!! 교사와 특수교육지도사(나는 이 직명이 옳다고 여긴다)가 서로 돕는 동료의 관계인데, 특수교육보조교사로 시작한 명칭을 보조원으로 만들어버리고, 특수교사의 지시·관리를 받는 자로 법에 명시하여 특수교사와 보조원을 갑과 을의 관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게, 그것도 학교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집으로 보내는 학교 안내장에 ‘엄마는 가장 좋은 선생님입니다’라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안전교육과 바른 생활습관을 학부모님께서!! 집에서부터!! 잘 지도해주시란 내용으로 보내진다. 나 또한, ‘엄마처럼 내 아이다 생각하고 장애학생을 잘 돌봐주세요’ 부탁받고 채용되었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놀아주는 것처럼 아니? 내 아이보다 더 최선을 다해 읽어주고 놀아주는데 이런 것은 ‘지도’이니,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저 밥 먹이고 화장실 뒤처리해 주고 그림자처럼 보조만 해달라는 것이다. 책을 읽어주는 것이 교사선생님이 하면 지도가 되고 이옥랑 실무사 선생님이 읽어주면 지원이 되는, 사람을 급을 나눠 가르치는 이런 일이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다. 나란 사람이 학교 안과 밖에서 각기 다른 사람이 아닌데도,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지도는 허용이 안 되는 그저!! 보조원이어야 하는 것이다. 특수교육실무사는 관리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존중 받아 마땅한, 특수교사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동료다. 그 안에 사람은 없고 그저, 관리하기 편하도록 만든 이름과 법!! 의도가 그러하기에 너무 나쁜 법이고 너무 나쁜 이름이다. 이것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 “보조선생님~ 여기 와서 이것 좀 도와주세요”
학교 내 비정규직들은 직종이 80여종이 넘는데도 불구하고 업무 겹침이 거의 없어, 업무가 곧 직명이 되고 직명이 곧 호칭이 되어 불리웠다. 시간과 노동력을 요하는 일들이 많아, 선생님들이 수업에 집중하는 시간이 적으니 교수활동 외 업무들을 종류별로 나눠 계약직을 고용하여 맡겼기 때문일 것이다. 즉, 비정규직 선생님들이 학교 안에 없었으면 정규 선생님들의 업무가 얼마나 방대했으며 그 업무처리 하느라 학생들에게 할애해야 할 시간들이 얼마나 침범당했을 것인가? 지금도 정규교사 선생님들의 업무가 많아서 수업 중에도 팝업이 뜨고, 간간이 불려나간다. 즉, 학교 내 비정규직 선생님들은 정규 선생님들이 해야 할 일을 나눠 준 고마운 동료인 것이다. 그런데도 급이 낮은 비정규직으로 생각하고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된다”며 조롱하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하니 참!! 참담하다. 그래도, 업무가 직명이 되고 호칭으로 불려지는 것은 바로 잡았다.
“저기~ 보조쌤, 이것 좀 도와주세요” “스강쌤 피구해도 돼요?” “상담쌤, 상담실에서 놀아도 돼요?” “여사님, 국물 좀 더 주세요!” 이런 상황이 공문이 시행되면서 바로 잡아졌다. 학교 내 모든 교직원은 선생님으로 부르고 호명할 때는 이름과 선생님을 붙여 부르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호칭의 문제를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서, 공문으로 시행해 바로잡은 것도 너무 황당하다. 학교가 얼마나 급을 나누고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이 사람에게 맞나? 아닌가? 따지고 차별하였으면 민원이 들어와서 공문으로 시행이 되었겠나? 학교가 정말 학교다우려면 비정규직의 처우를 법대로!! 처리해야 진정, 학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처럼 모든 교직원들에게 바르게 응대하고, 학생들에게 그리하도록 가르쳐야 그것이 진정한 학교인 것이다. 가르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른 이중적인 학교에서 이중적인 생활을 배워 나간 학생들이 우리나라를 바르게 이끌리 만무하다. 가르치는 것과 행하는 것이 같아야, 배운 것을 행하며 우리나라를 바르게 바꿀 것이다. 역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고 더 나빠지는 이유는 교육계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교육계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 68만원 받아요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편도 50여분 거리를 다니면서도 출근이 즐거웠다. 지각할 것 같으면 미리 택시를 탔다. 택시비로 얼마를 썼는지 계산도 안 해봤다. 9시 전에 출근해서 5시까지 근무하는데 쉼 없이 아이들과 재미나게 놀아주며 월급날 받는 돈은... 차 떼고 포 떼고, 68만원 정도!! 차라리 집에서 쉬는 것이 더 나았을 그때 그 시절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행복하고 보람찼으니 됐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기보다, 받는 급여와 사람을 함께 묶어서 평가하고 정리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데, 2006년 그때나 15년이 지난 2021년 지금이나 그 사실은 변하지 않고 더 견고해지고 있다.
# 자네가 거기 왜 앉나?
학교를 옮겨 더 열심히 특수교사선생님과 학생들을 보조하다 보니, 다음 해에 그 학교에 다시 채용이 되었었다. 새로 오신 교사 선생님 7명과 특수교육 보조인력 1명. 그래서 환영식 테이블 여덟 자리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행정실에서도 환영식이니까 그곳에 앉으래서 앉았는데 교감선생님이 갑자기 “자네가 거기 왜 앉나?” 하며 쫓아내셨다. 너무 황망했다. “네?” 하며 교감선생님을 바라봤는데 “저리 가 앉아요.” 하더니 기존 교직원 옆자리로 가라고 하셨다. 정규 교직원과 비정규직은 한 테이블에서 밥도 먹지 못하고 환영도 못 받는 건가? 이건 정말 따라올 것이 없다. 쓰린 기억 중 가장 센 기억이다. 13년 전 일이고 요즘은 이런 일들은 없다. 아마도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을 하면서 우리 선생님들이 현장을 바꾸신 결과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교과서 밖에서 참교육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알려주는 참 선생님들은 바로!!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선생님들이신 것 같다.
# 그대 없이는 못 살아~
환영식은 너무 아팠지만 그 학교에서의 생활은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 엄마보다 연세가 많으신 특수교사 선생님께서 “우리 이옥랑 선생님은 버튼만 누르면 만들어내는 자판기 같아.” “그대 없이는 못 살아~”노래를 부르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안팎으로 학생만 생각하시며 어떻게 하면 원리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늘 고민하시던 선생님이셔서 아이디어를 주실 때마다 만들어야 할 교구가 늘어났고, 선생님이 O.K 할 때까지 다시 만들기를 반복하다 보니 새로운 일들은 끝나지 않고 계속 쌓여갔다. 5시 퇴근을 못하고 6시 넘어서 퇴근하면서 혼자 울기도 했다. 기쁘게 자원해서 열심히 했는데 눈물 나게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 그래서 늘 바쁜 사람. 기쁘고 기분은 좋은데 몸이 힘들어 눈물 났던 2년이었다. 지금은 만든 교구보다 사는 것이 더 예쁘고 안전하다며 구입하여 쓰고 있다. 요즘 교구들이 정말 잘 나온다. 참 다행이다.
# 17개 시도교육청 중 전남만 무기계약전환 배제
교육부에서 인건비를 받는 11개 직종은 당연히 무기계약으로 넘어갔다는데, 유일하게 전남만 특수교육실무사 직종을 배제시켰다. 다른 시,도는 당연 무기계약직이라는데 전남만 아니라고 해서 생후 8개월 된 아이를 안고 전남 도교육청 칼파람에 맞서 피켓을 들었다. 최종 사용자인 전남 도교육청마저도 우리를 차별하여 버리려 한 것이다. 피켓을 들고 있는데 교육감 선생님의 차량이 지나다 멈춰섰다. 그리고는 내 피켓의 문구를 보고 정문을 지키던 주무관님께 뭐라뭐라 말을 건네고 가셨다. 그 주무관님이 내게 와서 전해 주셨는데 “저거 확인해 봐.”라고 하셨단다. 말이 안 된다. 수장이 몰랐을 리 없다. 어쨌거나 다행히, 무기계약 전환 공문이 내려오긴 했다. 선생님들과 돌아가며 무안 칼바람을 맞았던 기억,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욕지기가 나오는 기억이다.
# 시간제 일자리 특수부터
하다, 하다 정부마저도 우리를 버리려 했다. 장애영역 지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로 치부하였고, 학생들에 대한 정보나 현장에 대한 파악이 없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정책을 밀어붙이려 했을 것이다. 교육부가 나서서 특수교육 대상 학생들과 특수교육지도사들을 버리려 한 것이다. 2015년 1월 '시간제일자리 특수부터'라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전국학교비정규직 노동조합에서 반대성명서를 발표하고 개인적으로는 1월 6일 국민신문고에 투고를 하였다. 전국 특수분과 분과장 이하 조합원들이 신문고에 함께 글을 올리는 등 온 힘을 다해 막으려 애썼고, 1월 15일엔 학비노조 간부들과 교육부가 면담을 했다. 정말, 하나가 되어 대처하고 막았기에, 사람도 ,학생도 없는 숫자만을 위한 충성정책! 기업스런 일자리 정책은 그렇게 없던 일이 되었다.
벌써 6년이 지났다. 우리 사용자도 우리 정부도 버리려 한 일을 나는 너~무 사랑한다. 백만돌이 같이 꺼지지 않은 나의 텐션은 그래야 설명이 된다. 어떤 학생도, 어떤 상황도 이제 감히!! 예견이 되고 파악이 되는 15년차다!! 칙칙하고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밝고 유쾌하게 만들어 준다는 긍정과 희망의 아이콘! 해결하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는 일을 조용히 해결하여 주는 해결사! 불편한 것을 편하게 바꿔주는 맥가이버! 터덕대고 설은 관계도 부드럽고 친하게 만들어 주는 평화전도사!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선생님들이 생겨난, 나름, 인기쟁이! 내가 이리 쓰니 부끄럽지만, 자평이 아니라 들려오는 소문이... 소문이~그렇다는 얘기다 ^^;;;
길이 없었기에 전국학비노조와 길을 만들며 걸어왔다. 이제는 체험했기에, 내가 가면 길이 된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함께 걷는 이들이 더 많아졌기에 더 열심히 가 보려 한다. 포장 공사까지 마친 길을 걸어오는 후배들이.. 원래 있던 길인 줄 알고 선배들을 대접해주지 않더라도 그들과 가 보련다. 이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의 어제는 보람찼고 오늘도 행복했으니 내일은 반드시 더! 행복할 것이다.
~~♪♬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 ♬ ~~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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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최우수상] 권윤숙 / 급식실 노동자의 삶
급식실 노동자의 삶
조리실무사 권윤숙
새벽 5시,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밥상을 차려놓고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
어깨며 허리며 근육통이 채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끌고, 6시 전에 버스를 타야 했다. 검수 준비를 위해서 7시에 출근을 해야 한단다.
이제 막 입사한 나로서는, 이해하기도 항변하기도, 너무 벅찬 출근길이었다. 아이들이 9살, 10살이 되면서 재취업을 해야겠다 마음먹고, 공고문을 보고서 장거리 학교 급식실에 원서를 냈다. 한번 떨어지고 두 번째 합격한 터라,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아이들 휴대전화, 집 전화를 총동원해서 깨우고 일을 들어갔다. 그러면 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단다. 10살 형이 동생을 깨워서 식은밥을 먹이고, 씻기고, 전기, 가스를 확인하고서야 학교를 갔다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인 나는, 정신없이 일을 했다. 늦지 않게, 식지 않은 따뜻한 점심을 먹이기 위해 말이다.
그러다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는 날도 있었다.
‘ 비 맞고 오겠네. 우산 가지고 갔나?’
아이들은 비에 흠뻑 젖어 돌아오고... 아픈 맘을 내색할 수 없던 나도, 아이들도 그렇게 단단한 돌이 되었다. 여기서 누구라도 힘들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이들이 정말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아이들은 사물함에 여유분 우산을 놓고, 아침마다 일기예보를 보는 습관을 가졌다. 일을 시작하면 휴대전화를 볼 수 없었기에, 급한 연락을 하기가 어려워, 하루는 큰아이가 아빠한테 연락을 한 일이 있었다. 중요한 회의에서 벨이 울려 난감한 상황에서 사장님이 받아보라 하셨단다.
“아빠, 오늘 비 와요?‘
당황스러운 질문에 마지못해 ’응‘ 이라고 대답했던 남편은, 지금도 그때도 아이들과 내가 얼마나 힘들게 버텨냈는지 다는 알지 못 한다. 중간에 아이가 열이 나서 병원에 갔더니 뇌수막염 의심이 나와, 검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네 식구가 며칠을 병실에서 자고 출근을 했다. 학교에 양해를 구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해 감원이 있다 해서 차마 말을 못 했다. 장거리에 아이들이 어리니, 아무래도 그 대상이 내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일이 서툴렀던 나는, 민폐 끼치기 싫어서 되지도 않는 속도를 맞추다, 다리가 호스에 걸려 갈비뼈를 수도꼭지에 부딪치는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역시 말을 못 했다. 참고 퇴근한 후 다음날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서 하루 쉬었다. 퇴근길에 넘어졌다라고 하고 말이다. 그때는 감원의 대상이 된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컸다.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버티며 받아든 월급 내역서...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TV에서나 들어봤지, 그런 월급을 받아보니 ’이거 계속 다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봉이라 그런지 일에 대한 자긍심도 갖지 못 했다. 어디 가서 엄마 급식실 다닌다는 말 하지 말라고, 애들이며 남편한테 신신당부하기 일쑤였고, 누가 알기라도 하면 죄지은 것도 아닌데, 부끄러웠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1년을 보내니 무기계약직으로 전환이 되었다. 박봉에 힘든 육체노동이라고 자긍심도 갖지 못한 직장이었는데, 막상 무기계약직이 되니, 해고의 불안정 속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심신의 안정이 찾아왔다. 겁많은 사람이라 이 눈치 저 눈치 보다, 미뤄뒀던 숙제 같은, 전국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에도 가입했다. 급여의 변화도 생겼다. 근속 수당이 생기면서 경력자의 처우가 나아졌다. 단순히 월급의 상승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면 미래에 나도 저 정도의 대접을 받을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힘들게 일하면서도 선배님들은 그랬다. 무리한 작업요구를 요청해도 해야 된단다.
왜? 라는 의문에 ’남의 돈 벌기가 쉽니? ‘ 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억울하면 출세해야지‘ 라는 패배주의를 무심코 받아들였다.
이렇게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많이 배우지 못한 패배자들일까?
쉽게 구할 수 있는 직업이니, 마음대로 부리고, 쉽게 해고해도 되는 노동자일까?
어느 해, 한 국회의원이 ’밥하는 동네 아줌마‘ 라고 비하하는 일이 있었을 때, 한 앵커가 이런 멘트를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의 추억에도 교집합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도시락‘일 겁니다.
도시락은 추억인가 하면, 또한 노동이었습니다.
매일 새벽이면, 서둘러 일어나 챙겨야 했던, 반복되는 그림자 노동!
그래서 어머니들에게 학교급식 전면시행은, 해방의 날이었고, 혹자는 도시락에서 해방된 날을 일컬어 ’여성해방‘ 의 날이라 말하기도 하더군요.
도시락은 또한 계급이기도 했습니다.
서로가 비교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그깟 계란 하나에 아이들의 계층이 갈리고, 남모를 열등감과 낭패감을 하루 한 번씩 겪어야 했던... 그래서 어머니들 마음까지도 상처 입게 했던...
그러니 도시락이 없어지고 학교급식이 시행됐다는 것은, 그 모든 도시락의 추억과 어머니들의 끝없는 노동과 특히나 교실에서 일어났던 계층의 갈등까지도 모두 공교육이 대신 책임져 주었던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밥하는, 동네, 아줌마‘
늘 하는 일이고 그것도 누구든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뭉쳐진, 이 세 단어의 조합으로 인해 상대를 업신여긴다는 뜻이, 필연적으로 강해지는 그 발언...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도시락의 추억과 어머니의 노동과 교실에서의 차별을, 대신 짊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달랑 세 단어로 비하되기엔, 그들이 대신해 준 밥 짓기의 사회학적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나는 이 브리핑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 번도 이런 정중한 표현으로,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다.
같이 사는 남편도, 자식들도, 심지어 같은 공간에 있는 학교 사람들도 모른다.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면서, 동료들 간 화합하며, 시간 내에 위생적으로 음식을 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브리핑을 들으며 나도, 수많은 학교 급식실 노동자들도 자긍심을 가지길 바란다.
우리는 그저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환경미화원들이 쓰레기를 치워주지 않는다면, 재벌들도 깔끔한 사람들도 쓰레기더미 속에 파묻히고 만다. 어떤 것은 귀하고, 어떤 것은 하찮은 일 같은 것은 없다.
우리의 일도 그렇지 아니한가?
평소엔 아무도 느끼지 못 하다가, 파업을 할 때에는 온갖 저주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이들을 볼모 삼아 뭐 하는 짓이냐며, 아주 나쁜사람들 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댄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이렇게 밥 한 끼가, 급식실 노동자들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나?
그런데 정작 평소엔 왜 그리 하찮게 대하는 걸까?
파업을 하면 불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가 날 것이다. 그러나 그 분노를 노동자에게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다른 편에서는 사용자에게 항의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환경미화원들이 파업을 할 때는, 시장 집 앞에 쓰레기를 갖다 놓고 성실히 교섭해서 해결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파업은 노동자들의 최후의 보루다. 사용자가 성실히 교섭하지 않을 때만 갖는 법적인 권리이며, 학교 비정규직 파업이 있을 때, 우리 사회도, 애들 밥 굶긴다고 노동자들을 손가락질 할 게 아니라, 교육청에 성실히 교섭해, 파업을 끝내라는 항의 전화를 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랜다.
또한 귀족노조라며 파업을 부정하는 인식도 점차 바뀌길 원한다. 노동자들도 특히 육체노동자들도 일한 만큼, 정당한 댓가를 받고 지식층만큼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하고, 우리도 생각을 바꿔나가야 한다. 그렇게 몇 번의 파업이라는 소용돌이를 겪으며, 5년이 지나 전보라는 제도가 시행되면서, 근무지를 집 근처로 옮길 수 있게 됐다. 새벽 5시에 기상하지 않아도, 어둠을 뚫고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그동안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도, 고등학생이 되었다. 잘 자라준 아이들도 기특하고, 고비도 많았지만 힘든 일을 묵묵히 해내온 자신도 대견하다. 8년 차 급식 노동자로 살면서, 온갖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지만, 천직처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하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 희망이 있다면, 학교 급식실 일자리가 힘들기만 하고 박봉인 나쁜 일자리가 아닌, 자식들 키우며 먹고 살 만하다 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중년여성들의 일자리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남자 조리사들도, 젊은 청년들도 하고 싶어하는 질 높은 일자리로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방학 중에 비근무자들의 생계대책도 마련되어서 생계불안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해 본다.
’나는 자랑스런 학교 급식실 노동자‘라는 말을 하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란다.
[2021학교비정규직공모전 대상] 유미향 / 여섯개의 오렌지 돌리기
여섯개의 오렌지 돌리기
초등돌봄전담사 유미향
<새벽의 약속>에 나오는 로맹은 여자친구 발랑틴에게 뽀뽀를 받고 싶어 한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과 3알을 돌리기 시작해 ‘학교에서, 복도에서, 친구들 앞에서’ 열심히 연습한 결과 오렌지 다섯 알에서 여섯 알을 돌릴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오렌지를 돌리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위해 매일 매일 돌리는 오렌지가 있다. 엄마, 아내, 책, 운동, 글쓰기, 돌봄 전담사라는 오렌지를 돌리며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중 돌봄 전담사라는 오렌지가 가장 컸다. 이건 내 직업이고,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내가 돌보고 있는 돌봄 아이들은 맞벌이, 다문화, 한 부모, 다자녀로 구성되어 있고, 누가 봐도 사회적 약자다.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해준다는 명목하에 학교 밖으로 나가는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다. 이 아이들이 ‘고위공직자나 재벌, 국회의원 등의 자녀라면?’ 이렇게 쉽게 학교 밖으로 내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아이들은 안전한 학교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하고, 공적 돌봄 안에서 안전하게 지낼 권리가 있다. 나는 현재 나와 우리 돌봄 아이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
나의 싸움은 코로나 19와 함께 시작되었다. 코로나 19는 순식간에 우리의 삶을 바꿔놓았다. 2020년 1월 말에 시작된 코로나 19는 3월이 되어도 끝날 줄 몰랐고, 현재진행형이다. 2020년 3월에 학교는 개학하지 못했다. 겨울 방학에도 쉬지 않고 운영되던 초등 돌봄교실은 코로나로 그 중요성이 더 커졌다. 정교사들이 재택 근무할 동안 ‘긴급 돌봄’이 시작되었고, 긴급 돌봄의 아이들은 오로지 돌봄 전담사들의 몫이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근무였던 우리 돌봄 전담사들은 ‘긴급 돌봄’을 충실히 수행했다. 책상과 교실 소독은 물론, 발열 체크도 수시로 했고, 손 소독을 강조하고, 마스크를 턱밑으로 내리는 아이들을 지도했다. 교육청에 출석 인원을 보고하고, 간식과 점심도 챙겼다. 교차 근무로 오후 1시부터 저녁 7시까지 근무하는 날에는 이 모든 일과 함께 저녁밥까지 먹이고 퇴근해야 했으니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개학은 계속 뒤로 밀렸다. 반복된 날들은 육체적 · 정신적으로 피로가 쌓였고, 몸은 이상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다 깜짝 놀랐다. 왼쪽 목에 불룩한 혹이 생긴 것이다. 너무 놀랐고, 병원에서 갑상선 호르몬 검사를 했지만, 이상 없다고 했다. 약을 먹어도 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진찰하고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자 큰 병원으로 옮겼다. 속이 타는듯한 뜨거운 조형제를 넣고 CT를 찍었다. 혹 부위는 크고 하얗게 보였지만 화학적으로는 별 이상이 없다고 했다. “원하신다면 혹 속의 물질을 주사기로 빼고, 알코올을 넣어 말려 줄 수는 있습니다.”라는 의사의 말은 무시무시하게 들렸다. “아니에요. 조금 더 지켜볼게요.” 하며 갑상선 암이 아니라는 말에 안심했다. 긴급 돌봄이 계속되는 동안 몸은 더 피곤해졌고, 정신적 긴장도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내 몸이 이러니 알아주세요.” 할 수도 없었다. 약을 먹어도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 목의 혹은 계속 신경이 쓰였다.
5월에 개학했다. 코로나는 여전히 무서웠지만, 계절은 시간에 맞춰 꽃이 피었고 순식간에 땅으로 떨어졌다. 아름다운 봄의 계절이 오고, 봄바람이 불 듯 돌봄 전담사의 고생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긴급 돌봄’으로 고생한 돌봄 전담사들의 수고와 노력을 알아주는 이 하나 없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솥에 삶아 버리듯,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돌봄교실 지자체 이관’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자체 이관이든? 교육부 소속이든? 월급만 받으면 되는 거지. 뭐가 어때?’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고용 승계는 없다.’라는 말은 망치가 되어 내 머리를 사정없이 두들겼다. 한번 두들겨 맞은 정신은 빨간불을 깜빡이며 가만 놔두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도 몰랐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었지만, 큰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노조에 대해 ‘맨날 생떼(?)나 쓰는 사람들’이란 오해와 불신도 있었다. 그래도 믿을 건 학비 노조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부 또는 교육청 혹은 학교가 내 목을 붙잡고 흔드는 것을 알아챈 후 목이 몹시 아팠고(이때까지도 목에 생긴 혹도 없어지지 않았다), 단칼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다. 내 발로 노동조합 연수에 찾아가게 되었고, 이후로 2020년 11월 6일 총파업에 참여하기까지 많은 일이 지나갔다. 총파업에 다녀온 후 일기를 썼다.
“생수 40병과 귤 5kg 2박스를 준비하는 담당이라 무거웠다. 신갈 굴다리 밑 시외버스정류장까지 남편이 태워줘서 고마웠다. 10시 30분에 노조원들을 만나 관광버스에 올라타면 되는데, 9시 30분에 도착하여 여유가 있었다. 1시간 동안 시외버스 터미널 대기실에서 책을 읽었다. 김민섭의 <나는 지방대 시간 강사다>라는 책이다. 지난번 수지 도서관에서 있었던 저자의 zoom 특강을 듣고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렸다. 지방 대학에 인문학 강사로 재직하면서 겪었던 비정규직의 설움과 불합리에 대한 일들을 써 놓은 책이었는데, 내 이야기 같아서 술술 읽혔다. 이 작가의 zoom 특강은 내게 큰 울림을 줬다. ‘당신 인생에 부조리가 들어왔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스스로 대답해야 합니다.’라고 내게 말했다. 작가님은 책을 썼고, 대학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내게도 지금 그런 위기가 닥쳤기에 나 스스로 대답을 찾기 위해 노조 연수를 들으러 갔었다.“
10시가 넘어가자 노조원분들이 속속 도착했다. 처음엔 파업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노조원분들이 막판에 동참해줘서 버스에 28분이 탔다. 처음 보는 얼굴이 많았지만, 목적이 하나였기에 반가움이 컸고 고마웠다. 교육부 앞에서의 파업은 내게 커다란 힘을 줬다. 전국에서 모인 초등돌봄 전담사들을 보며 '나 하나는 미약하지만, 그 작은 힘을 보태면 큰 힘이 될 수 있겠구나!'를 느꼈다. 그러나 간간이 비가 내릴 때는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자괴감도 들어 살짝 슬프기도 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교육부 파업 참여에 대한 소감을 한마디씩 했다. '내 권리는 내가 찾아야 한다.’ ‘자꾸 뒤로 뺐는데 오늘 파업 집회를 보고 느낀 점이 많다.’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공적 돌봄은 꼭 지켜져야 한다.' 등 다들 공감되는 말씀을 나눠주셔서 좋았다. 그렇게 연대의 힘을 느꼈고, 이렇게 하면 뭔가 이루어질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긴급 돌봄‘은 끝이 났고 학교가 안정적으로 운영되자 내 목에 있던 혹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런데, 2020년 11월 총파업 후 나는 생각지도 못한 다른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총파업을 마치고 온 우리에게 학교의 높으신 분께서 ‘투명 인간’ 취급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볼모로 파업에 참여한 비양심적인 사람’으로 낙인을 찍은 뒤 우리의 인사를 받지 않고, 모르는 척 지나가셨다. 그렇다고 나도 같이 그분을 투명 인간 취급할 수는 없었기에 받지 않는 인사라도 참 열심히 했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에게 상처받지 말자.’ 속으로 여러 번 다짐했지만, 마주칠 때마다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학비 노조가 내 뒤에서 버티고 있다는 든든함이었다. 내가 무기 계약직이 아니었을 때는 2월 말에 한 번씩 계약만료 통지서를 받았었다. 일을 계속할 수 없다는 계약만료 통지서를 받고 나면 팔다리의 힘이 풀렸었다. 팔다리의 힘을 다시 넣어준 것은 학교 비정규직 노조였다. 내가 노조에 힘을 보태고 있지 않을 때도 노동 조합원들은 힘차게 싸워주셨다.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될 수 있게 해 줬고, 파업에도 눈치 보지 않고 참여할 수 있게 해줬고, 투명 인간 취급에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모든 힘은 노조를 믿었기에 가능했다. 작은 파도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파도가 덮치듯이 투명 인간 파도를 간신히 넘으니 더 큰 파도가 다가왔다. 버스 안에서 감동과 좋은 말과 연대를 말씀하셨던 노조원들의 협조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11월 총파업에 참여했던 노조원들이 ‘너무 힘들었던 것일까?’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라고 생각한 것일까?’ 속내를 알 수 없는 무반응들이 이어졌다. 아직 우리가 승리한 것이 아닌데, 우리는 갈 길이 멀기만 한데, 노조의 그 어떤 부탁이나 협조에도 반응이 없는 침묵 상태가 계속되었다. 땅바닥에 딱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는 젖은 낙엽 같은 노조원들의 무반응은 간부들도 덩달아 지치게 했다. “왜?”라는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물러나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기력에 시달리는 나의 고민을 알게 된 지인은 <송곳>이란 책을 읽어보라고 알려줬다. 나는 최규석의 <송곳>을 읽고 다시 힘을 내보기로 했다.
“같이 살자고 총대 멨는데, 지들 생각만 하니까 미치고 환장하겠지? 그거 반장 병이야. 원래 지도 떠들다가 반장만 되면 떠드는 애들이 죄다 바보 같고 한심해 보이는 법이거든.” p207 최규석의 <송곳2> 중에서
그래 그랬다. 반장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도와주지 않는 거야?’ 하고 미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마음을 다잡는다. ‘우린 한배를 탄 사람들이다. 노를 거꾸로 젓지만 않는다면 우린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좀 힘들더라도 미워하지는 말자.’라고 다짐했다.
2021년 6월 19일 우린 다시 교육부 앞에 모였다. 2020년 11월 6일 총파업 이후 개선안을 내겠다고 약속했던 교육부는 지지부진했고, ‘개선안’이라고 내놓은 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개선안이라 쓰고 ‘개악 안’이라 읽어도 충분한 내용에 우린 분노했고, 또 한 번 뭉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송곳>에서 힘을 얻었다.
"싸움은 경계를 확인하는 거요. 어떤 놈은 한 대치면 열대로 갚지만 어떤 놈은 놀라서 뒤로 빼. 찔러봐야 상대가 어떤지 알 거 아뇨. 내가 뭘 하면 재들이 쪼는지 내가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싸우면서 확인하는 거요. 싸우지 않으면 경계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걸 넘을 수도 없어요." p92 최규석의 <송곳2> 중에서
"뺏어도 화내지 않고 때려도 반격하지 않으니까. 두렵지 않으니까.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거요! 살아 있는 인간은 빼앗기면 화를 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웁니다." p181 최규석의 <송곳2> 중에서
2021년 8월 5일 교육부의 발표가 났다. 돌봄교실을 확충하고 운영 시간을 늘린다는 것이다. 우린 절반의 승리를 거둔 느낌이었다. 지자체로의 이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일단 물꼬는 막았다. 그러나 최종 목표인 상시 전일제 전환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훅 들어온 내 삶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고자 노동조합 교육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내 삶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엄마로서 딸과 ‘공정, 능력주의, 희생’에 대한 사회적 이야기를 나누고, 아내로서 남편에게 ‘노조 활동’에 대한 이해를 구한다. 소설책을 읽던 내가 ‘노동, 인권, 연대, 비정규직’에 대한 책을 읽고, 돌봄 전담사로서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무엇보다 나의 입은 경기도 교육청 앞에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고, 나의 손가락은 단톡방에 노조 소식을 퍼 나르고 있다. 내 팔은 ‘투쟁’을 외치기 위해 힘차게 들어 올리고 있으며, 내 발은 한 달에 한 번씩 서울 노조 회의나 파업, 궐기 대회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빨간불이 들어왔던 내 머리는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를 궁리하며 밝게 빛나고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로맹이 발랑틴에게 받았던 달콤한 뽀뽀 같은 말랑함은 아니다. 아니, 교육부가 내 볼에 상시 전일제라는 말랑한 뽀뽀를 해 주길 원한다. 상시 전일제를 받는 날까지 나는 오늘도 노동조합 오렌지를 열심히 돌릴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에’ 더 열심히 돌릴 것이다. 나 자신, 돌봄 전담사,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 떨어지지 않도록 파이팅!!
2021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 안내
[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 안내 ]
올해 7월에서 8월에 걸쳐 진행되었던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를 내다”라는 주제로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이 드디어 마무리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학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겪는 차별과 서러움, 여성노동자로서 겪는 일과 가정, 돌봄 등의 어려움, 나아가 이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수기와 시, 그림, 사진 등을 통해 잘 전달해주셨습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공모전에 응모된 총 76건의 작품 중 22분이 입상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심사위원은 수기 부문에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님, 시 부문에 이상임 시인님, 최종 심사로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박미향 위원장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앞으로 열릴 공모전에도 관심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노조에서도 지금 모인 작품들이 많은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더 고민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부
이름
직종
부문
대상
경기
유미향
돌봄전담사
수기
최우수
경기
권윤숙
조리실무사
수기
전남
이옥랑
특수교육실무사
수기
우수
전남
김현희
돌봄전담사
수기
인천
안성미
조리실무사
수기
경남
정수진
조리실무사
수기
경기
김은희
돌봄전담사
시
장려
울산
곽영미
조리실무사
수기
경기
권점늠
미화
수기
전남
김서현
행정실무사
수기
서울
김숙희
조리실무사
수기
광주
노미춘
조리실무사
수기
부산
노정숙
조리실무사
수기
인천
방애경
유치원교육실무사
수기
경북
윤정희
조리사
수기
대구
이준길
운동부지도자
수기
경남
임하정
영어회화전문강사
수기
부산
최낙숙
조리실무사
수기
경기
김은주
특수교육지도사
시
서울
민현순
교무행정지원사
시
부산
김수진
방과후전담사
그림
경기
박양미
조리실무사
그림
< 17차 정기중앙위원회에서 진행된 시상식 사진>
심사평
심사의 말씀
최현숙 / 구술생애사 작가
글쓰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즉 생각과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남이 읽어주기를 원하는 글이라면 읽는 이에게 뜻이 잘 전달되도록 글을 매만지는 것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잘 쓰는 글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있겠지만, 저는 관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건과 상황과 사람에 대해 남의 위치와 시선이 아닌 나의 위치와 시선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과 질문을 잘 풀어낸 글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글”이며, 그런 글은 혹 아직 잘 매만져지지 않았거나 문법과 맞춤법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더없이 매혹적인 글이라 생각합니다.
노동현장 뿐 아니라 그와 직결된 여성 개인과 가족 및 사회생활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저 뿐 아니라 이 글들을 읽는 모든 분들이 많은 공부와 성찰과 질문들을 얻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단절이 된 후 다시 나온 사회에서 여성들이 부딪치는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 일 가정 양립의 어려움, 급식현장의 바쁘고 고된 노동 내용과 위험과 근골격 질환을 비롯한 갖은 질병과 사고들, 학교와 유치원 돌봄 현장 노동의 세세한 내용들, 미화원 노동자에 대한 체력검사 과정에서 겪은 모욕감, 비혼과 이혼과 사별로 한 가정의 생계부양자는 물론 부모 돌봄까지 도맡게 되는 여성의 생애, 남성 노동자가 학교 복싱 교육자로서 하는 제언, 급식 조리사에서 시작해 진보정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한 경험 등, 제게는 모든 글들이 중요한 공부거리였습니다. 심사위원 제안을 받았을 때 학교비정규직의 다양한 현장 노동자들의 말과 느낌과 노동 내용 및 노동조합과 개인의 성장과정을 배우게 되리라 기대했던 저로서는, 글을 주신 분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 고민 속에 “대상”으로 선정한 유미향 선생님의 글은, 돌봄 전담사로 일하며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겪은 많은 경험과 느낌과 고민뿐 아니라 그에 관한 세세한 기록들,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과 고민들, 답을 찾고자 생각을 넓혀주는 노동 관련 책을 찾아 읽고 그 배움을 내 현장에 맞게 재해석하는 과정, 나의 노동현장을 넘어 타인의 노동과 다른 노동들에 대한 공부를 통해 “노동”과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넓고 깊게 이해해 나가는 탐구 과정, 자기 성장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질문들이 상세하게 드러나 있어 좋았습니다. 노동조합 활동의 보람과 어려움과 더불어 노조 활동 안팎의 갈등과 섭섭함에 대해서도 자신의 느낌과 말로 잘 드러내 주셨습니다.
17세에 교무실 “김양”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심부름 노동을 시작해, 28년간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로서 호칭과 직책과 노동 내용이 변화된 과정들에 대한 김서현 선생님의 글도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학교 안 사람들의 식사 및 그 준비와 마무리를 오롯이 도맡지만 자신의 식사 시간과 "밥값"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억울함에서 출발한 투쟁들, “봉사정신”으로 시작한 감정노동이지만 끊임없이 봉사가 강요되는 노동 현장에서 돌봄 노동자로서의 분노와 자각, "보조 교사"나 "교육실무원"이라는 모호한 호칭에서 비롯한 노동 범주의 애매함과 갖은 치다꺼리 노동들, "보조"라는 단어에 갇힌 차별과 모멸감, 성별로 인한 젠더 차별과 함께 남성 상급자의 성희롱까지, 모든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에 대한 인식으로 노동조합을 찾아 활동하고 이를 통해 얻은 자기 정체성 확립과 노동현장의 변화, 노동조합의 성과와 과제 등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들도 좋았습니다.
한편 장차 돌봄 노동자로서 생각과 삶을 확장하는 데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대부분의 글에서 보이는 한계에 대해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혹 나의 관점과 느낌이 가족중심주의와 폐쇄적 모성담론, 국가중심주의, 성과주의 등에 갇히지 않았는지 더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듯 여겨지지만 “자식 돌보듯이......”라는 표현 속에는, 여성을 가정과 모성 안에 묶어두려는 자본과 국가가 만든 족쇄에 여성 스스로 제 발을 채우는 측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는 책임감이지 소위 “모성”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 다양한 여성주의 글과 책들이 있으니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나아가 노동현장 및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넘어, 자본과 국가와 여성노동의 관계에 대한 공부와 고민이 더 이어졌으면 합니다. 자본과 국가는 여성이 가정과 사회에서 하는 모든 노동을 “사랑”과 “봉사”라는 이름으로 무임금과 저임금으로 묶어두는 착취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해왔고, 최근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 불평등과 착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돌봄 노동의 가치와 중요성 및 “돌봄 사회로의 전환”이 말로만 언급되고 있는 최근 상황에서, 돌봄 노동에 대한 인식과 처우의 대전환과 투쟁을 위해서는 현장 노동자인 여러분들의 경험과 목소리가 어떤 정책전문가나 연구자들의 이론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글을 주신 모든 분들이 계속 글을 쓰시기를 간곡히 권합니다. 글쓰기는 나를 돌아보고 나와 우리의 현재를 확인하며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 가장 쓸모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글 제출 여부와 상관없이 학교비정규직 현장 모든 노동자들의 수고와 분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 사 평
이 상 임 / 시인
올해 작품 공모전의 주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를 내다!”이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당하는 차별, 서러움, 고용불안 등의 문제와 특히, 여성노동자들이 일을 하면서 가정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시를 통해서 생생한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시를 써낸 분들 모두 주제에 잘 부합된 내용으로 자신의 일자리에서 겪게 된 고충들을 섬세하고 진실하게 표현해 주었다. 그 섬세함과 진실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시의 화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가에 대해 쉽게 전이된다.
한 작품, 한 작품에 모두 애정이 간다.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삶의 쓰라림, 고통, 그럼에도 견뎌내야만 하는 자신의 인생 앞에서 조금씩 전진하며 그 희망의 숲을 찾아가는 여정이 시의 행간마다 조용하면서도 치열하게 스며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 뼈가 부러져 깁스를 해도 부축해 주는 이 하나 없는 비정규직의 현장. 도와주는 이 하나 없이 일을 끝내고 햇빛 하나 없는 의자에 앉아 허공만 바라보는 비정규직의 삶. 더 이상 허망할 수 없다.(류양희) 새들도, 풀꽃들도 자리가 있고 하루를 시작하는 해도 자리가 있는데 공무직은 자리가 없다. 투명한 그림자로 이 세상에 남아 있을 뿐이다.(민현순)
듬성듬성 파뿌리 보일 때 만난 친구, 해고된 비정규직인 친구의 방패가 되어 도와 준 내 친구, 시들어버린 꽃처럼 살던 내게 햇빛이 되어준 친구, 그 친구는 다름 아닌 학교비정규직 노동조합.(김은주) 남들은 모두 즐겁게 듣는 ‘토요일은 밤이 좋아’를 토요일엔 무서워서 텔레비전을 끄고 우는 딸 앞에서 할 말을 잃은 엄마. 엄마는 토요일도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만 한다. 늦게 오는 엄마를 홀로 기다리는 토요일. 그 긴 시간이 딸은 무섭다.(김숙희)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을 쳐도 늘 제자리. 베이고 데이고 살이 뜯기는 상처와 고통들. 자존감을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처우와 사회의 시선. 멀고도 험한 그 길을 견디게 하는 힘은 오직 투쟁뿐.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생존의 이유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옮겨 앉는 일이다.(노현정)
떨고 있는 미래, 서러운 불안을 안고 우리 함께 길 위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신윤선) 젊음을 등에 업고 열심히 지지고 볶았더니 이제 몸 여기저기가 아파서 고치고 또 고치고 고쳐서 다시 쓰는 일만 남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지금보다 나은 환경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 희망으로 또 지지고 볶는다.(김준미)
산다는 것은 때로 풀잎의 잠을 풋풋하게 흔들어 깨우는 일, 어제보다 더 푸른 꿈의 발자국이 봄처럼 찬란한 영광의 함성으로 비정규직의 벽이 무너질 때 우주가 쿵, 하고 흔들릴 것입니다.(김은희) 온 종일 음식을 조리한 열 손가락은 밤이면 아려오지만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어주는 이들의 행복을 노래하고 밤이면 꿈속에서 희망을 조리한다.(김영애)
이 사회에서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만큼 고통스러운 일인지 작품마다 내면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중에서 쉽지 않게 세 작품을 가려냈다.
산다는 것은 (김은희)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 문제를 항의하러 교육부 앞마당에 모여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봄날에 진달래가 부풀어 오른다.’던가, ‘꽃잎 같은 숨소리를 내며 꿈이 커가는 아이들처럼 우리들의 웃음도 또르르르 구른다,’고 빗댄 표현들이 이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는 무거운 주제를 유연한 비유와 일상의 가벼움을 통해 서정적으로 잘 표현해 주었다.
언제나 내편 (김은주)
‘시들어버린 꽃처럼 살던 내게 햇빛을 비춰 세상의 눈 밝혀준 늦게 만난 내 친구’는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이다. ‘학비노조’를 이렇듯 다정다감한 친구로 의인화하여 표현함으로써 ‘노조’를 삶 깊숙이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공무직의 자리 (민현순)
이 시를 읽으면 첫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쓸쓸함이 감돈다. 새들이 살아가는 허공에서, 풀꽃들이 살아가는 땅 위에서, 지혜와 가르침이 매일 피어나는 교육현장에서 화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자리를 살펴본다. 그렇게 꼼꼼하게 살피는 데는 이유가 있다. 화자가 처한 공무직의 자리를 확인하고 싶어서다. 그러나 끝내 그 자리는 없다. 세상을 바라보는 섬세함이 돋보이는 시다.